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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카테고리와 스펙트럼

스펙트럼에는 바깥의 존재가 없다

카테고리는 어떤 공통점을 바탕으로 전체가 부분으로 나누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그 기준이 된다. 하지만 스펙트럼은 모든 것이 연속적이고 명확한 경계가 없기 때문에, 전체를 일정한 너비로 나누더라도 그 기준을 하나로 제한하여 설명하는 일은 모호하고도 어렵다. 그래서 설명을 해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무엇부터 무엇까지’라는 범위, 즉 둘 이상의 기준을 요구하게 된다. 대신 스펙트럼은 어떤 순서로 이 흐름이 구성되었는지는 쉽게 설명해 낼 수 있다. 스펙트럼 속 모든 개체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중 가장 비슷한 의미의 두 개체는 그 비슷함을 이유로 나란히 자리한다. 따라서 왜 이 개체는 아래에 있는지, 위에 있는지 혹은 왜 A 개체가 C 개체보다 B 개체와 가까운지는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의미의 교집합이 연속할 때, 그 총합은 수많은 개별 합이 이룬 나름의 의미를 가진 큰 그림이자 이유의 흐름이 된다.


덕분에 스펙트럼에서는 나와 꽤나 닮은 존재들이 공허했던 내 양 옆을 채워준다. 하지만 내 옆자리에 나와 그나마 가장 비슷했던 누군가가 자리를 비운다면, 그 옆에 자리한 제3의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오고 그가 내 옆을 채우게 된다. 그에게는 이전에 내 옆에 자리했던 이에게 느낄 수 없었던 조그마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와 나 사이의 괴리가 생길 것이다. 나와 비슷하다곤 하지만 이전의 누군가보다는 덜 비슷한 존재이기에 그와 내가 덜 비슷한 만큼, 이전의 누군가와 나 사이의 공통점이 이제는 희미해진 만큼의 괴리가 생기고야 만다. 그렇게 내 옆의 개체, 곧 의미가 하나씩 실종되고, 그로 인해 관계를 규정하는 이유가 희미해질수록 전체 또한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이 되어가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나는 모든 전체를 스펙트럼으로 명명하기 원한다. 카테고리에는 어떻게든 빈틈이 있다. 그 빈틈의 누군가는 배척되며 부유한다. 카테고리에는 개체가 부분에 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이 이미 설정되어 있다. 기준이 존재에 앞서기 때문에 새로움과 다름은 그 기준이 들지 못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로 두 사람 사이의 강하고도 오묘한 감정을 규정하곤 하지만, 그 단어가 정의한 카테고리는 모든 사람의 엇비슷한, 하지만 저마다 다른 감정을 담아낼 수 없다. 그 개인조차도 혹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연인이나 가족조차도 저마다 다른 의미로 이 감정을 정의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느낀 순간의 감정 하나를 무한한 축으로 이루어진 N차원 위 하나의 점이라 나는 정의했다. 무한한 범주 아래 무엇과도,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유일하고 독립된 점, 감정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의미를 나는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존재의 좌표에는 영점이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완벽할 만큼 동일한 존재는 있을 수 없고, 모두가 다름은 부분에 속한 모두를 단 하나의 기준으로 대변할 수 없음과도 같다.


스펙트럼에서 한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개체와 전체뿐이다. 카테고리와 달리 스펙트럼에서는 부분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 부분을 아무리 나누더라도, 나누고 보면 그것은 곧 또 다른 전체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개체는 있을 수 없다. 두 개체 사이의 작은 공통점 하나로 이 관계는 모든 것이 납득된다. 공통점이 없는 둘은 없다. 무엇이든 의미가 있고 어떤 관계라도 그 의미 사이에는 이유가 있다. 관계를 규정하는 공통점이 희미해질수록 전체의 의미와 이유의 흐름이 제공하는 개연성 또한 사라져 갈 것이기에, 더더욱 모든 존재가 전체로 규정된 그 범주 안에 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내 옆의 누군가가 가진 의미는 내가 이 전체에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고, 나의 존재 또한 누군가에게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외되어야 하는 이는 없다. 누군가가 소외될수록 나를 대변하는 의미조차 편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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