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그 자리에 있었을까
이런 업무 지시받아본 적 있는가?
“그냥 대표님 옆에 서 있다가, 시키는 거 하면 돼요.”
그날은 9월 출시할 신제품의 연출컷 촬영날이었다.
출근한 지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 갑자기 팀장이 내게 말했다.
"점심을 좀 빨리 먹고, 촬영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아, 또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구나 싶었다.
내가 맡은 제품도 아니고, 나도 따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저 같은 팀이라는 이유로, 누가 필요하면 당장 동원되는 구조.
점심은 빵으로 대신했다.
허겁지겁 20분 만에 먹으면서 급한 일을 같이 처리했다.
촬영은 다른 건물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스튜디오’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냥 회의실 같은 공간이었다.
현장에 도착하자, 외부 사진작가 한 명 외에는 전부 내부 인원이었다.
대표가 직접 촬영물을 디피하고 있었고, 심지어 몇몇 소품은 집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회사는 비용 절감 측면에 꽤 진심이라는 걸.
뭘 도우면 되냐고 물으니, 유경험자가 말했다.
"그냥 대표님 옆에 있다가 시키는 거 하면 돼요."
듣자마자 멍해졌다.
뭘 찍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서 있다가 시키는 걸 하라고?
그렇게 눈치 보며 서 있었는데,
30분쯤 지나서 브랜딩팀 직원 두 명이 더 도착했다.
처음엔 단순히 구경하러 온 줄 알았는데, 한참 지나도 안 가길래 물었다.
"혹시 도와주러 온 거예요?"
"네~" 하고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총 네 명의 직원이 촬영장에 투입됐다.
우리는 대표가
"토핑 좀 갖다 줘요", "접시 닦아줘요", "이거 다시 세팅해 주세요"
라고 말할 때마다 뿔뿔이 흩어져 심부름을 다녔다.
그 외 시간엔 모두가 대표의 손길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 순간, 약간 현타가 밀려왔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지?’
그렇게 촬영은 12시 반쯤 시작되어, 오후 5시에 끝났다.
4시간 넘는 시간 동안 계속 서 있던 탓에 발바닥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바쁜 현장도 아니었고, 실제로 일하는 사람은 한두 명뿐이었다.
경험 있는 직원 한 명만 있어도 충분했을 자리였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사전 설명 하나 없이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컨셉인지, 어떤 소품이 필요한지, 미리 뭘 준비하면 좋을지
안내만 있었어도 훨씬 효율적으로 움직였을 거다.
경험자 위주로 배치했으면 인력도 대폭 줄일 수 있었을 거고.
이 회사에서 자주 드는 생각이 있다.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일을 할까?’
하루하루가 다 ‘배움’이라고 하기엔,
이런 현장은 그냥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 나는, 스튜디오 한편에서 그저 시키는 일만 기다리는 사람으로 오후 시간을 통으로 소비했다.
무엇을 배웠는지 되묻기에도 민망한 날이었다.
남은 건 허기진 배, 뻐근한 다리, 그리고 이런 생각.
‘내가 대표라면 이렇게 안 할 텐데.’
내가 어떤 사람과,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싶은지
조금씩 기준이 더 명확해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