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일하게 된 바뀐 팀장은 믿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유능했고, 한 팀으로서 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선배라면
어느 정도는 보호막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최근에 알게 됐다.
공장 시험생산까지 마친 제품의 출시가 불분명해져,
협력업체에 드랍(중단) 메일을 보낼 일이 있었다.
팀장에게 물었다.
“대표님이 드랍하라고 하신 거죠?”
“그럼 드랍한다고 메일 보내도 될까요?”
팀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네, 맞아요. 보내세요.”
나는 그대로 실행했다.
며칠 뒤, 대표가 물었다.
“누가 드랍하겠다고 했어요? 내 말 뜻은 드랍이 아니었는데.”
팀장은 말했다.
“민연님이요.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걸로 이해하고 메일 보냈어요.”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팀장 말 그대로 따랐을 뿐인데, 이렇게 내 책임이 되는구나.
다행히 눈치 빠른 대표가 곧 상황을 파악했는지
“내가 언제 제품 중단하자는 얘기 한 적 있냐”며 팀장을 나무랐다.
그날 이후 한 가지를 배웠다.
회사에서 신뢰는 말로 쌓이지 않는다.
좋은 동료나 상사라도, 내가 한 말을 기억해줄 거라 믿는 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서로가 기억하는 맥락은 언제든 다를 수 있다.
그때마다 누가 옳았는지를 입으로 증명해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피곤하다.
그래서 이제는 다르게 일한다.
지시를 받으면 메신저에 한 줄 남긴다.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어제 보고드린 내용 기준으로 메일 발송하겠습니다.”
짧고 단순하지만, 그 한 줄이 나를 지켜준다.
회사는 믿음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다.
기억보다 기록으로, 감정보다 근거로 움직이는 시스템 안에서
내 일과 책임의 범위를 명확히 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믿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그 믿음이 눈에 보이는 기록 위에 쌓여야 한다는 걸 안다.
그게 냉정해진 게 아니라,
직장 안에서 나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