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성 틀어진 업무를 바로잡는 현실적인 방법

실무자가 감당하는 비효율의 무게

by 감정 쓰는 직장인

개인적으로 회사에서 가장 지치는 순간 중 하나는

‘이 방식이 아닌 것 같은데 시키는 대로 해야 할 때'였다.

특히 그 방향이 애초부터 어긋나 있었을 때는, 거기에 들인 시간이 몽땅 소모된다.


시작부터 어긋난 방향성

최근에 식품 영양성분 데이터베이스를 가공하는 일을 맡았다.

회사에서 식단 기록 앱을 만들고 있어 개발팀이 데이터를 정제하는 중이었는데,

문제는 실제 사람들이 먹는 양과 식약처 DB에 기록된 양에 차이가 컸다는 것.

그들이 꽤 오랫동안 애먹고 있던 문제였다.

대표는 업무를 주면서 말했다.

“이런 건 내가 직접 하면 이틀 만에 다 하는데. 퍼널식으로 분류하면 금방 끝나.”

그리고 마케터 중 한 명에게 시키겠다고 했다.

그 한 명이 나였다.


의문을 품고 시작한 분류 작업

1만 여개의 음식 리스트를 한식·양식·일식·중식으로 나누고,

그 안에서 또 밥류·국탕류·면류 등으로 나누라고 했다.

왜 이 분류가 필요한지 설명은 없었으나 우선 시키는 대로 했다.

탕비실에서 마주친 개발팀 헤드가 스몰토크로 "일은 잘 되어가냐"고 내게 물었다.

대표가 시킨 방식대로 하고 있다고 했다.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걸 굳이 한식/양식으로 나누는 게 핵심은 아닌데...”였다.

작업 내내 찜찜했던 부분이었기에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미 절반 이상 진행된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대표에게 매주 중간보고를 해야 했기에

대표의 지시를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드러난 갈등

데이터를 보다 보면 분류 기준을 더 쪼개야 할 때도 있었는데

대표는 아주 단호하게 “그쯤에서 그냥 끝내라”고 했다.

그렇게 만든 분류를 개발팀에 넘겼더니 바로 챌린지가 들어왔다.

회의실에 모여 앉은 마케팅&개발팀은

개발팀 헤드의 “업무를 제대로 이해하고 시작한 게 맞냐”는 말을 서두로,

나름의 치열한 설전이 오갔다.

우리끼리 설왕설래해 봤자 답이 없다는 걸 알아서, 대표를 불렀다.

그 자리에서 대표는 말이 바뀌었다.

“내가 내린 지시가 틀리진 않았고...근데 개발팀 말 들어보니 그쪽 의견도 맞아.

좀 더 분류 쪼개서 다시 넘겨.”


똥개훈련의 끝에서 배운 것

그건 조금 수정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처음부터 하나씩 봐가며 다시 해야 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그냥 개발팀과 직접 소통하면서 일을 진행했다.

그렇게 결과물을 넘기면 개발에서 바로 확인하고, 수정 건은 반영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표는 또 “나한테 보고하고 넘기라”고 했다.

같은 회사, 같은 대표 밑에서 일하는데 왜 이렇게 우회해야 하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며칠간 작업을 마치고 보고 드리겠다고 하자

이번엔 “그냥 보고 없이 넘기라”고 했다.

그 며칠은 정말 온몸으로 ‘기준 없는 지시’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경험한 시간이었다.


나를 지키는 기준을 세우는 일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나를 지치게 한 건 일의 난이도가 아니라

정답에서 벗어난 방식을, 그저 윗사람의 말이라는 이유로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경험 이후로 나는 한 가지 원칙을 만들었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싶을 때,

실행부서에 이 방식이 맞는지 확인하고 그걸 상사에게도 이해시킨 다음 시작하기로.

방향과 기준 없이 시작한 일은 결국 누군가에게 책임이 흘러가게 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대체로 가장 실무에 가까운 사람이다.

조직은 얼마든지 변덕스러울 수 있기에,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한 기준은 내가 직접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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