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리더’ 체크리스트

번아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업데이트한 나만의 기준

by 감정 쓰는 직장인

금요일 아침, 출근길에 사내 메신저를 열어보니 팀장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는데, 신규 패키지 컨텐츠를 작성해야 한다는 미션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대표가 따로 설명해줄 거라고 했다.


그날 하루 종일 대표를 기다렸다.

월요일까지 완성해야 한다고 했고, 뭐가 됐든 간단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점심쯤 느지막이 출근한 대표는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나를 불렀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요지는 이랬다.

브랜드 소개와 건강 챌린지, 달력을 하나로 묶어서 신년 맞이 스페셜 패키지에다 얹혀라.

본인이 컨셉을 짜서 주고 싶은데, 뇌가 거기까지는 안 돼서 그냥 전반적인 내용만 설명하는 거라고 했다.


나는 부랴부랴 작업을 시작했다.

마음이 급하니 퀄리티가 잘 나올 리가 없었다.

대표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감이 안 와서, 방향을 달리한 1안과 2안을 나눠 만들었다.


월요일 오전, 1차로 팀장에게 보고했을 땐 별말이 없었다.

‘대표도 미세한 부분만 고치라고 하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보고에 들어가자, 적나라한 피드백이 쏟아졌다.

문장 앞뒤가 안 맞는다, 불필요한 단어가 많다, 브랜드 소개에 새로운 말 지어내지 말라….

사실상 전면 수정에 가까운 피드백이었다.


억울한 지점이 몇 가지 있었다.

1. 애초에 지시를 조금만 더 명확하게 했다면,

대표의 의중을 맞추려고 버전 1, 2까지 만들 필요는 없었을 거다.

2. 내 페르소나 시나리오를 보고 “스토리텔링 능력이 좋다”며 이 일을 맡겼다면,

그 스토리텔링을 어디까지, 어떤 부분에 적용하길 바라는지 힌트라도 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3. 일의 중요도와 긴급도는 둘 다 높은데, 그에 비해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이해하고, 재구성하고, 버전을 더 많이 만들고, 수정할 여유가 애초에 없었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경고등이 계속 울리며

"또 옛날 같은 꼴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 때려치는 게 맞지 않겠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를 번아웃까지 몰았던 전 직장 팀장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설명은 길지만 핵심은 없고, 애매한 지시를 던져놓고,

결과만 보고 “이거 왜 이렇게 했어?”라고 하던 사람.

지금의 대표와 예전 팀장의 일하는 패턴은 너무 닮아 있었다.


이번 일도 구조는 같았다.

지시는 추상적이고, 주어진 시간은 짧고, 결과만 보고 가열차게 까는 방식.

여기에 “너는 스토리텔링을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시작한지라,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페르소나 스토리텔링은 일주일 동안 붙잡고 쓴 작업이었고,

이번 패키지는 만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정리되지 않은 회사 아이덴티티와 제한된 단어 안에서 결과를 내야 하는 일이었다.

내 역량이 갑자기 낮아진 게 아니라,

애초에 잘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는 걸 인정하니 조금 숨이 쉬어졌다.

그래서 나쁜 리더 구분하는 기준을 업데이트했다.

본인이 원하는 바를 구체적인 언어로 책임지지 않는 사람,
타인의 시간을 가볍게 다루는 사람,
손바닥 뒤집듯 한 시간 전의 피드백과 전혀 다른 방향을 또 제시하는 사람,
결과물 앞에서만 그 누구보다 날카로워지는 사람.

이 네 가지가 동시에 보이면, 그 사람 밑에서 내 능력과 멘탈은 함께 닳아간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이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만큼은

브랜드의 케어보다 먼저 나 자신을 케어하는 편을 선택하기로 했다.

좋은 면 위주로 보려는 마음은 그대로 두되,

‘이건 아니다’ 싶은 순간까지 긍정으로 덮어버리지는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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