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아웃: 게으른 게 아닌, 구조가 만든 무기력

by 감정 쓰는 직장인

요즘 이상하게 사는 것 자체가 지루하게 느껴졌다.

솔루션을 얻고 싶어 조언을 찾아봤는데, 대개는 나만의 취미를 가지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한 때는 직장에서 설렘, 재미, 보람, 성취감을 모두 한꺼번에 느껴본 적도 있다.

그래서 회사 밖이 아니라 회사 안에서 이 지루함의 원인을 찾고 싶었다.


뭐가 문제일까.

처음엔 컨디션을 의심했다.

잠을 늘리고, 운동하고, 푹 쉬기도 해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일이 많지 않은데 계속 피곤했고, 의욕은 안 생겼다.

이렇다 명확하게 설명할 길이 없으니 결론은 늘 나를 향했다.

내가 게을러진 탓인가?


보어아웃을 알게 된 건 유튜브를 통해서였다.

[일 잘하는 직장인의 특징]을 다룬 영상에서 심리학자 김경일이 번아웃보다 보어아웃이 더 위험하다고 했다.

그제야 알았다. 일이 많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지치고 피곤하고, 의욕이 사라지는지.


번아웃이 “불타서 끝나는 것”이라면, 보어아웃은 “조용히 닳는 것”

보어아웃은 바쁨이 아니라 공백에서 온다.

해야 할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내 역량이 쓰이지 않는 일’, ‘결과와 연결되지 않는 일’, ‘통제권 없는 일’이 반복될 때 사람은 서서히 텅 빈 피로감에 잠식된다.

그리고 그게 더 위험한 이유는 단순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본인도 늦게 알아차린다.

나도 그랬다. 겉으로는 아무 탈 없이 출근하고, 일하고, 모든 일의 마감도 맞췄다.

그런데 속으로는 이미 [조용한 퇴사]를 한 것과 같았다.


내가 겪은 세 가지 구조적 문제

첫째, 성과가 나기 어려운 판이었다. 회사 규모는 작고, 내가 맡은 건 이제 막 만든 카테고리라 인지도도 레퍼런스도 부족했다. 분명 일을 했는데도 이렇다할 성과가 눈에 안 보이니, 의욕은 갈 곳을 잃었다.

둘째, 책임이 분리되지 않았다. 내가 잘해도 다른 팀원의 구멍 때문에 결과물 퀄리티가 낮아지면, 결국 다같이 욕을 먹는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로 계속 질책을 들으면 사람은 “더 잘하자”가 아니라 “덜 맞자”를 배운다.

셋째, 기준 없는 지시가 일상이었다. 우선순위와 원칙이 아니라 감정과 즉흥으로 방향이 바뀌는 느낌. 어제 맞던 일이 오늘은 틀리고, 실무는 일애 집중하기보다 눈치를 더 보게 된다.


그때 깨달았다. 이건 내가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구조가 성과를 만들기 어렵게 설계되어 있고, 책임이 분리되지 않으며, 기준 없는 지시가 반복될 때, 의욕이 사라지는 건 꽤 정상적인 반응이다.


보어아웃 체크리스트

아래 항목 중 4개 이상이면, 번아웃이 아니라 보어아웃을 의심해볼 만하다.

(출처: Peter Werder & Philippe Rothlin, Boreout!)

1. 업무 시간 중 실제 업무와 상관없는 개인적인 일을 하는 시간이 많은가?
2. 겉으로 보기에만 바쁜 척하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있는가?
3. 퇴근할 때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도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되어 있는가?
4. 내가 하는 일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는가?
5. 정해진 시간보다 더 빨리 일을 끝낼 수 있는데도 일부러 천천히 하는가?
6. 직장에서 지루함을 느끼거나 무기력해서 짜증이 나는가?
7. 현재 직무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거나 성장이 멈췄다고 생각하는가?
8. 직장에서 동료들과 업무적인 대화 외에는 소통을 피하게 되는가?

이 체크리스트는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나 또한 아직 이걸 ‘이겨냈다’고 말하진 못한다.

대신 내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내 상태를 면밀히 관찰하는 일이 극복의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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