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으로 포장된 의무를 내려놓기로 했다
나는 사람을 싫어하는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정확히는 사람 사이에 생기는 피곤한 규칙을 싫어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 생일이면 12시 땡 치고 장문 문자 보내기
- 선물은 반드시 정성 담긴 손편지와 함께.
- 단톡방 대화에 참여 안 하면 예의 없는 것.
나는 이런 문화를 접할 때면 숨이 턱 막힌다.
어릴 때부터 관계 감각이 좀 꼬여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집에서는 엄마와 언니가 한 편인 것 같았고, 아빠는 대체로 혼자였다.
집이 편안한 곳이라기보다, 늘 분위기를 읽어야 하는 곳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나는 일찍부터 기댈 곳은 친구뿐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초등학교 때 한 번 꺾였다.
교회에 같이 가자는 친구 제안을 거절했고, 그 후로 어느 순간부터 배제되기 시작했다.
반이 바뀌어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전학도 잦았다. 낯가림이 심한 편이었는데 매번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대할 때 머리부터 굴리게 됐다.
‘얘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또 밀어내진 않으려나?’
고등학교를 지나면서는 [무리]라는 말이 특히 싫어졌다.
비슷한 성적끼리 자연스럽게 갈리고, 은근히 서로 견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체구가 작았던 나는 체육시간마다 교복을 도둑맞는 일도 여러 번 겪으면서 분노와 불신감이 쌓였다.
어느 순간부터 동성이랑 잘 지내는 건 어렵고 피곤하다고 마음속 결론이 내려졌다.
대학에 가면 좀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또 다른 종류의 피로가 왔다.
친한 무리 안에는 꼭 ‘룰’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생일은 행사처럼 치러야 하고, 선물은 받는 사람 취향보다 [본인이 주고 싶은 것]이 더 중요해 보였고,
시험이나 중요한 날에는 응원 문자를 보내야 하는 식이었다.
나는 중요한 날이면 그냥 맛있는 거 먹고 시간을 같이 보내면 충분한데,
그들에겐 ‘정해진 방식’이 있었다.
문제는 그 방식이 늘 따뜻함으로 포장된다는 점이다.
맞춰주기 힘들다고 말하면 내가 매정하고 차가운 사람이 되는 느낌.
그래서 꽤 오래 스스로를 설득했다.
원래 친구 관계는 피곤한 거라고.
내가 사회성이 부족한 거라고.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설득이 깨졌다.
내 석사 졸업식이었던 날, 친구 두 명만 왔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기념일엔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며 늘 서로에게 의무를 지웠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힘들었던 건 인간관계 자체가 아니라, 상호성 없는 관계였다는 걸.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나에겐 남아 있는 습관이 있다.
상대의 단점부터 먼저 보고, 속으로 깎아내리는 버릇.
당연히 기분 좋은 습관은 아니다.
다만 요즘은 그걸 인성 문제라고 결론 내리기보다,
내 마음이 [거리를 조절하자]고 보내는 신호로 해석하려고 한다.
앞으로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되기보다,
내가 덜 소모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고 싶다.
의무로 굴러가는 친밀감은 내려놓고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관계로 천천히 가까워지고 싶다.
그게 내가 배우고 싶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