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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D Feb 03. 2022

여행을 갈 수 있다면

학창시절 장래희망 칸에 늘 TV 방송작가와 매거진 에디터를 꾹꾹 눌러 담아 제출하곤 했다. 지방에 살았던 나는 미용실에 갈때면 볼 수 있는 잡지 속 그 반짝반짝하고 화려한 것들이 마냥 좋아보였다.




올해로 나는 매거진 7년차 에디터가 되었다. 매거진에서 일한다는 것은 매일, 매달 내 자신을 연마시키는 것과 같다. 매일 쏟아지는 정보,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매달 이어지는 촬영과 그 촬영과 스태프들을 이끌어가는 일. 스스로 이름을 걸고 일한 다는 점은 내 직업 선택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고된 일이다.


매달 마감을 치루며 탄생되는 책. 한달 간의 노력과 땀이 결실을 맺는 그 순간은 언제나 설렌다.


매달 전쟁 같은 마감을 치룬다. 스케쥴에 짜여진 대로 내 원고가 입고되지 않으면 마감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그에 따른 책임감과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하다. 매달 마감이 끝나면 수능이 끝난 것 같다고 주변에 말하곤 한다. 그만큼 마감하는 일주일은 매달 똑같은 분량의 고통(?)이 찾아오며 고되다.


인도네시아 발리로 향하는 비행기 안. 마감 후는 유일하게 내게 허락된 휴식 시간이다.


다행히 마감이 끝난 월 말에는 비교적 여유롭다. 이때, 난 어김없이 여행을 떠나곤 했다.

여행지의 조건은 늘 같았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마음을 놓고 푹 쉬다 올 수 있는 곳' 이었다. 그렇게 충전을 한 후 전쟁같은 마감에 임하는 것이다.

거짓말 같기도 한 현재,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행을 마음대로 갈 수 없게 되었다.



팬데믹 상황이 끝나면 가장 먼저 어디를 가고 싶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다.

한군데를 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곳들이 불쑥 불쑥 뇌리에 스치며, 상상만으로 가슴이 벅차 오른다.

요즘은 딱 한군데가 명확해졌다. 발리 '우붓'.


발리 우붓의 오두막 숙소. 침대에서 일어나 오두막 밖에 있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직원이 아침상을 차려 주었다.



2021년 1월 말부터 요가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난 지금 나는 당장 비행기를 탈 수 있다면 발리 '우붓'에 가고 싶다. 요가의 시작과 끝. 명상의 시간이 주어진다. 고요한 음악이 흘러 나오고,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그때면 나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발리 우붓의 산 속을 떠올린다.


풀벌레 소리가 나는 밤, 어둑한 산길 깊숙한 곳에 도착한 나의 오두막 숙소.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풍경이 아직도 어제처럼 눈에 선하다. 오두막 바로 앞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 그곳에 앉으면 '나 아침 먹을 준비가 됐어요'란 신호다. 별다른 말 없이도 그 신호를 보고, 푸짐한 아침 상을 차려준다.

따뜻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높은 나무의 하늘 하늘 거리는 잎사귀를 바라보는 일.

여행을 가면 평소엔 먹지도 않는 아침 먹는 일이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는 정처도 없이 우붓 골목 골목을 걸어다녔다. 어슬렁 어슬렁. 길을 잃으면 잃은대로 지도를 찾아볼 생각도 없이 계속 걸었다. 그 불분명함이 마냥 좋았다.


골목 구석 구석이 모두 매력적인 발리 우붓의 골목. 문앞의 문패, 바닥의 타일, 기도를 위해 올린 꽃 등이 모두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길을 걷다가 호기심이 드는 숍이나 물건을 발견 했을 때, 무심코 들어가 구경하는 것도 여행의 묘미 중 하나.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며 혹은 여행의 순간을 떠올릴 수 있는 소소한 물건을 사는 일을 참 좋아한다.

우붓 상점 거리를 어슬렁 거리며 걷다가 마음에 드는 실 팔찌를 보고는 바로 가게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가게에서 매듭 팔찌를 색깔 별로 샀다. 내것, 친구 것, 먼훗날 소중한 이가 될 사람을 위한 것.

여러번의 여행 끝에 깨달은 것은 마음에 드는 물건은 여러개 사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혹여나 잃어버렸을 경우 그 상실감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물건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여행의 기억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때 우붓 여행에서 구매한 팔찌는 여름이 다가올 때마다 내 팔에 고이 메어진다.

이 팔찌를 보면 그때의 행복했던 행보가 떠오른다. 기분이 수채화에 물감이 물들듯 서서히 좋아진다.


1 아기자기한 매력이 살아 숨쉬는 발리 우붓의 상점들. 2 우붓 여행에서 구매한 실 매듭 팔찌. 3 맛집으로 유명한 곳에서의 브런치.




사실 내가 발리 우붓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버킷리스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산속 통창 유리로 된 곳에서 요가를 하는 것.'

요가원은 미리 서치하지 않고, 길거리를 걷다가 사람이 많고 유명해보이는 곳을 우연히 발견해 예약했다.  

식사를 한 후 예약 시간에 맞춰 요가 수업에 도착했다.

특이했던 점은 요가 수업을 마치고 보통 명상을 하는 시간에, 징과 피리 같이 생긴 악기들로 강사가 직접 연주를 해주는 것이었다. 후에, 마음 명상이나 불면증에도 도움되는 싱잉볼이란 것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사바아사나 자세(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는 자세)로 그 악기 연주를 듣는 동안 나는 깊은 숙면에 빠져 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의 단잠, 그 개운함은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1 우연히 찾은 우붓 기야나르에 위치한 요가원.  2 요가 수업 후 마스터에게 부탁한 사진 한컷. 요가를 마치고, 짧지만 깊은 단잠에서 깨어나니 해질녘이 되었다.







첫째 날 밤에 찾은 레스토랑. 식사를 마친 후 계산서를 받았는데, 빌지에 조약돌을 얹어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요가를 하고 난 후, 어느새 길거리는 어둑해졌고 길가엔 고요함이 깔렸다.

원숭이가 나타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원래 여행에 계획을 잘 세우지 않는 편인데, 우붓에서 요가를 한 것은 신의 한수였다.

지금도 요가를 할 때면 그때의 풍경이 떠오르곤 하니까.

평화롭던 여행 첫째 날이 지나고, 앞으로 다가올 먹구름을 예상하지 못한 채 마냥 신나고 들떴다.

그렇게 우붓에서의 두번째 밤이 찾아 왔다.




-우붓 여행기. 2017.03.2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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