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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21. 2015

어찌할 수 없는 외로움

(2014.12.28, in London, UK) - 3

그러니까 그때 나는, 꽤 많이 헤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차디찬 런던의 한 겨울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라의 붉은 목골길을 헤매면서도 나는 내내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첫 유럽여행 중이었다.


처음. 누구에게나 설레는 단어다. 뻔하디 뻔해서 말로 꺼내기도 민망하지만 이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겨울이 오면 눈이 내리듯, 처음은 항상 설렘이라는 감정을 달고 온다.

런던의 어느 골목길

그로스베너 교회로 가는 길은, 길게 늘어선 붉은 벽돌의 주택들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한 나라의 수도라면 26년을 넘게 보아온 서울이 전부였기에, 이런 건물들이 있는 런던의 풍경은 생소함 그 자체였다(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저마다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 유럽은 어느 도시든 이런 느낌이었다. 외국인들이 북촌 한옥마을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이렇듯 아름다운 건물들이 계속해서 나타나니, 나로써는 걷는 일 자체가 행복이었다. 어떤 골목에서 사진을 찍어도 단어 그대로 '이국적인'느낌을 주는 예쁜 건물들이 찍혔다. 내내 먹은 것이라곤 싸구려 샌드위치 하나와 콜라 한 캔이었지만 그걸로도 행복했다. 그때의 첫 유럽여행은 그랬다. 무엇을 봐도 아름답고, 어떤 것을 봐도 새롭고, 무슨 일이 닥쳐도 즐겁고, 심지어 춥고 배고프고 길을 잃어도 그 상황 자체를 특별한 경험이라 여기며 즐길 수 있는건, 첫 여행의 특권이었다.

저 멀리 그로스베너 교회가 보였다

런던의 골목길 곳곳에 웃음을 새기며 다니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였던 그로스베너 교회에 다다랐다. 멀리서 본 교회는 옥색의 첨탑이 소박한 느낌을 주는,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였다.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정작 보려 했던 교회의 내부는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하긴, 일요일 예배시간도 아닌 다 늦은 저녁시간에 교회를 방문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교회 밖을 서성이며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근처의 옥스포드 스트리트로 걸어갔다.

런던 시내의 작은 공원

그로스베너 교회 근처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나 같은 여행자들 뿐 아니라 시민들의 작은 쉼터가 되어줄 수 있는 곳. 런던을 여행하면서 맘에 들었던 것 중의 하나는 이런 작은 공원들이었다. 프랑스의 정원들도 매력 있었고 이탈리아 광장들의 떠들썩한 분위기도 좋았지만, 런던의 크고 작은 공원들은 도시 곳곳에 위치해 있어 좀 더 친근한 느낌이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정원들이 정돈되고 인위적인 느낌을 줬다면, 영국의 공원은 조화롭고 아늑했다. 훨씬 가깝고 부담 없이 쉴 수 있는 느낌이랄까. 런던에서 살았다면 샌드위치 하나 싸들고 나와서 벤치에 앉아 한가로운 오후를 즐겼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추운 겨울만 아니었다면 당장 다음날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이었다.

하루 종일 걸은 탓에 조금씩 발이 아파온다고 생각할  때쯤, 옥스포드 스트리트의 초입에 들어섰다. 크리스마스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그 흥겨움이 가시지 않은 길거리에 있으니, 나처럼 혼자 온 여행자도 덩달아 고독감에서 벗어나 흥겨워졌다.


크리스마스 즈음 거리에 켜지는 꼬마 전구에서는 묘한 포근함이 느껴진다. 날씨는 참을 수 없이 추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이는 꼬마 전구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따스하고 포근하고 차분해지는, 어쩐지 다 잘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사실 평소였다면 떠들썩한 거리 분위기에 나 혼자 철저하게 혼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들어 못내 외로웠겠지만, 어차피 여기는 외국이고 아는 사람 하나 없으니 나는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고독은 오히려 마음을 가볍게 해줬다.


살다 보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들에 종종 처한다. 그럴 때면 대게 좌절하고 힘들어하곤 하는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고민하는 일은 괜시리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캔디는 그러고 보면 참 독한 소녀다.), 어차피 고민해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해결이 될 때까지 차라리 그냥 마음 편히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한결 가볍게 생각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라는 얘기다. 뭐, 어떻게 보면 반쯤 포기하라는 소리랄까..(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절대 이렇게 하지 못하긴 한다.).


그러니까 런던에서의 외로움은,
철저히 외로울  수밖에 없는 홀로 여행자의 숙명과도 같았다.
그리고 이 외로움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여행의 시작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친 꼬마 전구들 덕분이었다.
먼 타국의 길거리에서 나는, 작게 반짝이고 있는 전구들에게 위로받고 있었다.


해가 진 피카딜리의 밤 풍경

연말 분위기의 옥스포드 스트리트를 지나, 길게 이어진(이제는 익숙해진) 리젠트 스트리트를 쭉 따라 내려오니 런던의 상징적인 거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피카딜리 서커스의 전광판 앞에 도착했다. 해는 어느새 저물어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유럽의 겨울이 해가 짧다는 말은 익히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듣는 것은 실제로 경험하는 것만 못했다.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지는 유럽의 해는 참 야속했다(밤이 되어서도 계속 돌아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해가 빨리 지는 덕분에, 야경을 빨리 볼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여름이면 아홉 시가 되도록 떨어지지 않는 해 때문에 야경을 볼 수 없다는 글들을 심심치 않게 봤는데, 적어도 겨울의 유럽은 그럴 걱정은 없겠구나-싶었다.

해처드 서점의 간판

피카딜리 서커스를 지나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라는 해처드 서점을 향했다. 이 서점은 1797년부터 영업을 시작해, 영국 왕실에까지 도서를 납품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서점이 크면 얼마나 크겠어-하는 생각으로 잠시 몸을 녹일 겸 들어간 이 곳은 서점의 크기부터 분위기까지 왜 이렇게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5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일반적인 소설, 시,  전문서적뿐 아니로 아동도서부터 그림책까지 매우 다양하게 구비되어있었다.

서점 곳곳엔 한눈에 봐도 책을 사랑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군데군데 서서 유심히 책을 고르고 있었다. 나 역시 한국에서는 종종 서점이나 도서관 같이 책이 많은 곳에 무턱대고 가서 한참이고 구경하는 것을 즐겨했는데, 책이 많은 장소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런 장소에서는 책을 읽거나 사지 않아도, 그 곳에서 나는 종이 냄새를 맡거나 즐비하게 꽂혀있는 책들을 제목만 보는 것 만으로도 충만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런 내게 해처드 서점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장소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서점의 분위기에 이 나라 사람들에게 질투심도 약간 들었다. 우리나라의 대형 서점들은 깔끔하고 편리하긴 하지만 이렇게 고즈넉하고 유서 깊은 서점을 찾기  힘들뿐더러, 책을 읽고 싶게 만들고 누구라도 사색에 잠길 수 있는 분위기의 서점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 나라, 이 도시의 사람들은 참 풍부한 문화적 토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런 작은 부분에서 느낄 수 있었다.

헤처드 서점을 둘러보며 여유를 가진 나는 포트넘 앤 메이슨 매장에서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산 뒤 근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마지막으로 이 날의 일정을 마무리짓기로 했다.

포트넘 앤 메이슨 매장. 차를 좋아하는 어머니께 드릴 선물을 사고자 들른 이 곳은 생각외로 구경할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가는길에 보였던 빅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런던의 랜드마크인 빅벤이 있는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런던에 머물렀던 4일 동안 빅벤의 모습을 무척이나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유럽여행을 하면서 그 도시하면 생각나는 것들(빅벤, 에펠탑 등)을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겹게 볼 수 있었다. 런던의 빅밴같은 경우에는 템즈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런던 여행을 하면서 관광을 하기 위해 중심가로 들어서면 자연스레 볼 수밖에 없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모습

실제로 본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굉장히 웅장했다. 도심 한복판에 이런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은 상당히 이질적이면서도 독특했다. 외국에 나가면 자연스레 우리나라와 그 나라를 비교하게 되는데,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도 덕수궁이나 창경궁, 창덕궁, 경희궁 등등 각종 궁들이 자리 잡고 있으니 거대한 오피스 빌딩 숲 사이에 있는 그런 궁들도 참 독특한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내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들렀을 때는 성공회 미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미사를 기다리는 줄이 그리 길지 않았기에 조금 기다렸다가 사원 내부를 구경하며 미사도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내부의 사진은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찍을 수 없었으나, 내가 다니는 천주교의 미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떤 종교의 의식이든 엄숙하고 장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구석이 있음은 다 똑같다고 생각했다. 하루의 여행을 경건히 마무리하기엔 이만한 의식도 없으리라.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겪었던 에피소드 중에 아직도 내 뇌리에 깊게 박혀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장애인, 그리고 노숙자에 대한 그들의 배려였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목발을 짚고 있는 행색이 남루한 노숙자가 오자,  경비원뿐 아니라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가 길을 비켜주며 맨 앞에 마련된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습은, 당연해야 하는 모습임에도 내겐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니다, 사실 이 광경을 보기 전까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날 이후로도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이런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한국에서 나는 약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며 반성하게 만들었다. 영국은 괜히 신사의 나라가 아니었다. 미사를 30분 정도 보다가 숙소로 가기 위해 사원을 나섰다.



퇴근하던 정장 차림의 회사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일요일이었음에도 퇴근하는 듯이 보이는 직장인들이 더러 있었다. 문득 매일같이 퇴근길을 오가는 런던 사람들에게 이 길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졌다.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꿈이고 로망인 도시가,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자 현실일 수도 있는 것.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도시에서의 삶을 동경하며 생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여행자는 절대로 생활자가 될 수 없음을(되어서도 안됨을) 보여준다. 환상이나 이상을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 내리는 순간, 우리는 현실에 들러붙은 각종 고민들과 소위 말하는 '현실적인'일들에 직면하게 된다(그 도시의 살인적인 물가라든지, 사람들과 제대로  의사소통하지 못하는 내 비루한 언어능력이라든지).

그러니까 여행자는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생활자가 되는 꿈을 꾸지만
항상 그 꿈을 유예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셈이다.


그래도 여행을 할 때면 도시에서 최소 한 달 가량 살아보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그리고 여건이 된다면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기껏해봐야 4일에서 최대 10일가량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그것으로도 여행자에게는 충분하다. 아쉬움이 남을 때 쯤, 도시를 떠나면서 다음에 와서 봐야할 것들을 남겨놓는 것. 그래야만 나중에 이 도시에 또 와야 할 이유가 생겨난다.


그렇게 환상을 품고 사는 여행자가 처음 본 런던의 야경은 부드럽고 아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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