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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29. 2015

낭만과 운명의 상관관계

Scene in the Cinema - 냉정과 열정사이

유럽여행을 시작하기 전, 피렌체를 꼭 여행지로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때문이었다. 물론 피렌체는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인 도시임에 틀림없었지만 유럽여행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뒤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 영화를 보고선 꼭 피렌체의 두오모 꼭대기에 올라 Whole nine yards라는 냉정과 열정사이의 OST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 높은 곳에서 주황빛 도시를 바라보며 이 노래를 듣는다면 어떤느낌일지 궁금했다. 그때의 감정은 짜릿할 수도, 쓸쓸할 수도 있었다. 그걸 알기 위해서라도 나는 두오모에 올라야 했다.

두오모 성당의 모습. 정식 명칭은 '꽃의 마리아 대성당' 이라는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이다.

냉정과 열정사이는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의 책이 원작인 영화다. 책으로 먼저 접한 뒤 영화를 접해서였을까? 영화를 처음 봤을 땐 조금 실망스러웠었다. 소설은 Rosso와 Blu 두 권으로 나뉘어 각각 여자와 남자의 시선에서 둘의 연애를 바라본 독특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남자의 시선으로 다룬 영화로는 원작의 독특한 구성과 분위기를 온전히 살릴 수 없는 듯 했다. 책이 원작인 영화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지점들이 바로 이렇게 활자를 영상으로 옮겨 올 때의 느낌을 오롯이 살려내기 힘들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유럽여행을 위해 다시 본 냉정과 열정사이는 그 당시의 내 기분도 한 몫 했기 때문이었는지(유럽여행을 준비할 당시 나는 첫 여자친구와 헤어진 상태였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피렌체라는 도시를 향한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영화 속 쥰세이와 아오이의 엇갈린 인연과 재회가 녹아있는 피렌체라는 도시에서 나는 냉정과 열정사이의 촬영지를 찾아다니기로 결심했다.

피렌체라는 도시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도시 어디에 있든 보이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두오모 성당의 오랜지색 지붕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커다란 오렌지색의 지붕(쿠폴라)에 올라서면 피렌체 시내의 오렌지색 지붕들이 여행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흔히들 파리의 어디에 있든 에펠탑이 보인다는 얘기들을 하곤 하는데, 피렌체는 도시 자체가 워낙 작아서 파리에서 에펠탑을 보는 빈도수 보다 피렌체에서 두오모의 쿠폴라를 보는 빈도수가 훨씬 더 높았다.


두오모를 오르기로 했던 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두오모의 쿠폴라에 올라갔다. 겨울이라 그랬는지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올라간 쿠폴라에서 나는 아오이를 기다리던 그 시간속의 쥰세이가 어떤 느낌일지 생각해보며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저 하염없이 피렌체 시내를 바라보았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OST <Whole nine yards>를 시작으로 모든 트랙을 두 세번씩 듣고 있으니 가슴속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쥰세이와 아오이의 사랑을 쫓아가는 과정은 시작부터 둘 사이에 일어났던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와 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에 오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과 그 속설 때문에 10년 전에 했던 약속을 잊지 않고 두오모에 올라 하염없이 옛 사랑을 기다리던 쥰세이.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쿠폴라에 올라 쥰세이를 마주한 아오이. 가끔은 이렇게 말도 안되는 약속과 우연으로 설명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이렇게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앞날을 약속하며 그 사랑의 유통기한을 연장시켜나가는 존재들일테다.

누군가의 낙서. 이 곳에 올라오면 누구라도 그리워 질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낙서는 하지 말자.
쥰세이와 아오이가 재회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나오던 안눈치아타 광장의 모습

두오모에서 내려와 안눈치아타 광장에 오자,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그 둘이 내 눈앞에 나타나 재회하고 있을 것만 같은 곳이었다. 아마 이런 드라마틱한 재회장면이 현실에서 나에게도 벌어졌으면 하고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이 당시엔 그런 일이 벌어지길 바랐다. 그렇게나 만나고 싶었지만 항상 엇갈려왔던 상대방이 눈 앞에 나타났을 때 쥰세이는 아오이에게, 아오이는 쥰세이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걸까. 둘은 그저 아무말 없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한동안 서로를 바라본다.

피렌체는 이런 마법같은 일들이 내 눈 앞에서 벌어질 것만 같은 곳이었다. 당장에라도 이 광장에 남녀 둘이 재회하는 모습이 나타날 것만 같은 곳. 그리고 그럴 일은 없었지만 그 순간 그리운 사람과 보고싶은 사람들, 생각나는 사람들까지 그 모든 인연들과 운명들이 내 눈 앞에 나타나서 그리웠다고, 보고싶었다고 말해줄 것만 같은 곳이었다. 아니, 그저 바라보고 얼굴에 옅은 미소만 띄워주어도 좋을 것만 같은 그런 곳이었다. 피렌체에는 그런 마법같은 힘이 있었다. 무어라 콕 집어 말 할 수 없는 그 모든 사람과 기억들이 그리워지는 곳. 누군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살면서 알게 된 누구든 그리워지는 그런 곳이었다.

냉정과 열정사이는 유난히 피렌체의 골목길이 많이 나오는 영화였다. 물론 주인공이 피렌체에 살고 있다는 설정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막상 피렌체에 가보니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피렌체라는 도시 자체가 워낙 좁은 골목길들이 많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이 좁은 골목길 모두가 참 매력적인 도시였다. 파리의 골목길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과연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영화의 촬영지를 따라가는 여행 컨셉이 아니었다면 이 골목길들을 충분히 바라보고 즐길 수 있었을까 싶었다. 피렌체의 오래된 골목들은 저마다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을 것만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골목길을 돌 때마다 피렌체의 골목길 사이를 자전거로 열심히 다니던 쥰세이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쥰세이는 몰랐지만 아오이는 쥰세이를 피렌체에서 우연히 마주한다. 아오이가 친구의 결혼식에서 나왔을 때 마침 그 곳엔 골목길에서 고장난 자전거를 고치고 있는 쥰세이가 있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쥰세이는 그 순간 자신을 바라보던 아오이를 보지 못하고 자전거를 타고 그대로 갈길을 가고, 아오이는 친구의 부름으로 그 자리를 뜬다.

영화에서 둘은 그렇게 9500km가 넘는 일본과 이탈리아를 가로지르는 질긴 인연으로 묶여있었지만 마주할 수는 없는 사이였다. 한참을 피렌체의 골목길을 헤메이다가 쥰세이가 자전거를 고치는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는 아오이가 있던 그 장소에 도착했다. 가만히 그 장소에 서서 아오이의 시선으로 그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으니, 괜시리 영화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헤어진 옛 연인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마 서로에 대한 오해로 헤어졌던 이 두 사람에게 기억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오해로 가득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사랑은 오해로 가득차있는 감정이다. 연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오해로 시작하고, 서로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오해로 끝나고, 그렇게 끝난 서로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는 오해로 질척거린다.

피렌체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미켈란젤로 언덕을 가는 길에는 영화 속 쥰세이의 집으로 나오는 골목길이 있었다. 실제 내부 촬영은 다른 곳에서 했을 지도 모르지만, 쥰세이 집의 풍경으로 나오는 곳은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영화 속 그와 친구들의 고민들이 내 앞에서 되살아나는 듯한 곳이었다.


내게 피렌체라는 도시는, 골목길이 사랑스러운 도시였다. 사람들이 흔히 파리의 골목길에서 길을 잃어야 한다고 하지만, 피렌체의 골목길 역시 한 번쯤 헤메어도 좋을 곳이었다. 돌이켜보면 여행했던 모든 도시들에서 나는 유명한 관광지보다 골목길에서 더 그 도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피렌체의 골목길은 파리에 비해 훨씬 더 불규칙적이고 좁은 골목길들이 가득했지만 오히려 그런 점들 때문에 골목길마다 소박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기분을 받을 수 있었다.

피렌체의 골목길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켈란젤로 언덕을 오르기 전, 그 밑에는 둘이 함께 첼로연주를 듣는 장면을 촬영한 공원이 있다. 쥰세이와 아오이가 그 공원에 도착하자, 대학시절 교정에서 둘이 함께 들었던 그 곡이 흘러나온다. 심지어 그 당시 첼로 연주를 하던 음대생까지 똑같이 말이다. 영화에서 쥰세이는, 그 음악을 듣자 마자 신이 내려준 기적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물론 이 기적과도 같은 일은 아오이가 사전에 계획했던 일이었지만, 이때 둘에게는 이미 기적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 없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둘이 피렌체라는 도시에서 10년 만에 다시 만나 함께 길을 걷고 음악을 듣고 있다는 일 만으로도 이미 그것은 충분한 기적이었으니까. 아마 내가 유럽여행에서 영화 촬영지를 따라다니고자 했던 것도 어쩌면 현실에서 벗어나 이런 기적과도 같은 영화의 장면들 속에 나를 한껏 밀어넣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촬영지를 찾아 다니며 느꼈던 것은
여행이 현실을 벗어나는 일이라면,
그 일에 환상이라는 양념을 더하는 법은
영화 속 촬영지를 찾아서 그 공간에 나를 던져놓는 일이었다.

피렌체 시내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미켈란젤로 언덕이 이 날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피렌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앉아 해가 지고 불빛이 하나 둘 켜지는 피렌체 시내의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온 몸으로 쓸쓸함을 마주하고 있으니 오히려 마음은 한결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이때는 이미 여행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을 때라 쓸쓸함과 고독함이 익숙해져 있던 상태여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하루종일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수많은 생각들을 하고 나니 오히려 결론은 단순해졌었는데, 이 때의 내가 내린 결론은 "순간순간의 감정에 최선을 다하자"는 뻔하디 뻔한 결론이었다. 그 감정이 기쁘고 희열에 가득찬 감정이 되었든 혹은 슬픔에 몸부림치고 쓸쓸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감정이 되었든, 어쨌든 그 모든 감정에 최선을 다해 내 마음을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 던져넣어보자는 것이었다.


어쩌면 쥰세이와 아오이가 다시 만나 그렇게 낭만적인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주위 사람들이 보기엔 너무나 무모해보이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그들을 오롯이 던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단어는 전혀 낭만적인 단어가 되지 못하기도 한다. 운명의 장난이라든지, 운명을 받아들이라든지 등등, 일상에서 운명이라는 단어가 항상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단어와 결합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연인들은 60억 인구중에 서로를 알아본 운명적인 존재라고 믿으며 운명 혹은 숙명이라는 단어의 낭만적인 부분만 받아들이곤 한다. 그렇기에 낭만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그런 운명의 낭만적인 부분만을 믿는 무모한 연인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낭만적인 운명이라 믿고 감정의 소용돌이에 뛰어든 쥰세이와 아오이처럼 말이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다 본 피렌체 시내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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