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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14. 2015

그들 각자의 여행 방식

(2014.12.28, in London, UK) - 2

여행의 매력은 내가 계획한 대로 일정이 진행되지 않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
내가 계획한 일정, 내가 계획한 장소와
전혀 다른 계획으로 여행을 할  수밖에 없을 때,
그제야 우리는 자신이 여행에서 느끼고자 했던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느낀다.
빈틈없이 계획을 세워놓고 여행을 하다 보면,
때로는 내가 세운 계획에 내 자신이 얽매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세부적인 계획 없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나는 이런 말들로 변명하곤 하지만, 사실 이는 게으른 여행자의 핑계이기도 하다. 현실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춰 진행되는 여행이 가장 편하고 여유로운 법이다. 매 여행마다 '이번 여행은 계획대로 진행되었으면..'하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여행지에서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변수들이 생기고, 완벽하게 계획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꼭  한두 가지씩 까먹어서 난처한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여행에서의 이런 돌발상황이 주는 가장 큰 불편함은, 동행자가 있을 때 배가된다. 나는 보통 여행을 혼자 다니는 편인데, 이 가장 큰 이유는 동행자로 인해 느끼는 불편함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종종 놓이곤 하는데(여행이 인생과 닮았다고들 말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옆에 동행자가 있다면 '이 사람이 지금 피곤하지는 않을까', '계획이 틀어져서 짜증이 나 있지는 않을까' 등의 고민들을 하게 된다. 이럴때면 '차라리 나 혼자 힘들고 끝나면 괜찮을 텐데'하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는데, 이건 '착해서'라기보다는 싸우거나 짜증내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하는 내 성향과, 타고나기를 트리플 a형으로 타고난 내 소심한 성격 탓이 크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차라리 외롭고 심심하더라도 혼자 하는 여행을 선호한다. 혼자 하는 여행은 외롭고 고독하고 때론 심심하지만,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 이동하고, 계획을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계획대로 되지 않는 여행의 색다른 재미는 혼자 여행할 때라야 비로소 충분히 느낄 수 있다(이를테면 많은 이들이 말하듯 파리의 골목길에서는  한번쯤 길을 잃어 보는 것도 괜찮지만 동행자가 있다면 길을 잃은 순간 둘 사이의 불화가 시작된다.).

셋 다 보면서 놀랐던 극장 건물, London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이유는 런던에서의 첫 날, 아침부터 꼬이기 시작한 내 일정과 우연하게 만나 노팅힐까지 같이 가기로 한 두 여행객들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이 두 여행객은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가 오로지 유럽여행을 위해 만나서 같이 오게 된 사람들이었는데, 나로써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여행 방식이었다(어떻게 1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사이도 아닌 쌩판 남인 사람과 함께 국내여행도 아닌 해외여행을 올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가진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 역시 여행이 가진 다양한 매력 중에 하나이지만, 여행의 중간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과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내게는 여행지에서 우연한 인연으로 만나 잠깐 혼자 여행하며 느꼈던 외로움을 달래고 다시 여행할 힘을 얻는 방식이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방식이었다.


어쨌든 오전부터 유심칩과의 사투를 벌이며 묘한 동지애가 생겨난 우리는 노팅힐까지 같이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리버풀 스트리트 역에서  30분가량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노팅힐은 런던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용한 부촌이었다. 전통적으로 큰 저택들이 위치한 조용한 부촌이었던 노팅힐이 이렇게 관광객들이 찾는 마을이 된 것은 아마 영화 노팅힐(1999)의 영향이 가장 컸을 테다.

노팅힐의 깔끔한 거리, London

노팅힐의 줄거리는 사실 간단하다. 노팅힐에서 조그마한 서점을 운영하던 남자의 가게에(휴 그랜트)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줄리아 로버츠)가 찾아와 이를 계기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둘에게 일련의 시련들이 닥치고 오해가 생겨 잠시 멀어졌다가 극적으로 오해가 풀리고 둘이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하는, 그렇고 그런 뻔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하지만 뻔한 스토리 더라도 그런 스토리를 갖고 볼 만한 영화를 만든다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다. 노팅힐은 그런 의미에서 소위 '볼 만한'영화였고,  연출뿐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 역시 무척 훌륭했기에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입에 아직도 오르내리는 영화가 됐다. 그랬기에 런던 외곽의 이 조용한 동네로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영화를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노팅힐은  한번쯤 들러볼 만한 동네였다. 기본적으로 거리는 깔끔했고, 누가 봐도 잘 사는 동네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 나는 주택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우리는 연신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반복하며 걸었다). 왠지 영화 노팅힐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그런 동네였다.

노팅힐, London
노팅힐, London
노팅힐, London
노팅힐, London

노팅힐의 가장 유명한 볼거리는 사실 캠든 마켓, 코벤트 가든과 더불어 런던의 3대 마켓이라 불리는 포토벨로 마켓이다. 포토벨로 마켓을 제대로 즐기려면 엔틱마켓이 열리는 토요일에 와야 한다는데, 아쉽게도 내가 노팅힐을 찾아간 날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의 노팅힐은 제법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한산한 모습이었다.


노팅힐을 천천히 구경하던 우리는 이쯤에서 헤어지고 각자의 계획대로 노팅힐을 더 둘러보기로 했다. 나는 영화에 나온 촬영지들을 돌아보며 사진을 찍고자 했기 때문에 바로 지도에 표시해두었던 노팅힐 촬영 장소를 찾으러 이동했다.

노팅힐, London
주인공 윌리엄의 집으로 나왔던 파란대문, London

노팅힐에서 주인공의 집으로 나오던 파란 대문의 집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는 탓에 집 주인이 대문 색을 바꿨다가 다시 파란 대문으로 칠했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워낙 옛날에 찍은 영화라 주변 모습들은 조금씩 변해 있었지만 그래도 거리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영화의 종반부에 윌리엄이 안나를 쫓아 가던 장면, London
노팅힐, London

이 장면을 찍기 위해 노팅힐 골목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노팅힐의 더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포토벨로 마켓이 열리는 포토벨로 거리는 물론 파스텔톤의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매력적이었지만, 이 동네가 진짜 어떤 동네인지 알기 위해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 아닌 조금 떨어진 곳을 가 봐야 한다는 것을 여행의 시작에 알게 되었다. 물론 잠깐 머물렀다 가는 여행객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유럽 여행에서 영화 촬영지를  찾아다니기 위해 이곳저곳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을 갈 수 있었기에 조금 더 색다른 풍경과 그 지역의 매력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오직 그 한 장면을 촬영하고 눈에 담고자 했기에 나는 여행객들이 잘 가지 않는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곳, 유럽의 '동네 주민'들을 마주칠 수 있었던 장소에 나를 데려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노팅힐 촬영지를 둘러 본 뒤에 내가 갈 곳은 그 근처에 있었던 러브 액츄얼리의 촬영지였다. 런던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러브 액츄얼리를 다시 보고 꼭 이 장소에  한번쯤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더랬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 영화의 명장면 중의 하나일 스케치북 고백씬이  촬영된 장소다.

노팅힐 부근의 주택가에 자리 잡은 이 촬영지는 역시나 무척 조용하고 한산한, 평범한 동네였다. 파스텔 톤의 아기자기한 집들이 예뻤고, 유럽에선 꽤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돌로 된 도로가 인상적이었던 이 곳은 이 명장면이 탄생한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혼자서 한손엔 남녀 둘이 키스하는 로맨틱한 장면을 들고 한 손엔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고 있는 모습이 못내 웃기고 문득 솔로의 비참함을 느끼긴 했지만 이 동네가 퍽 맘에 들었다. 그래서 동네를 천천히 서성이며 한참을 걸어 다녔는데, 이 로맨틱한 장소에 시커먼 성인 남자 혼자 생각에 잠겨 걷는 모습이 남들 눈엔 꽤나 웃기게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생각해보면 저 장면은 이미 결혼한 남편이 있는 여자에게(그것도 친한 친구의 아내) 고백하고 키스를 하는, 현실적으로 보면 정말 천하의 나쁜 놈이자 비겁한 남자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가 너무나도 현실적이라면 우리가 굳이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저 장면을 기억하는 이유도 저 상황의 애틋함과, 그런 애틋함이 주는 낭만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런 평범한 동네에서 낭만적인 영화가 촬영된 것도 어쩌면 우연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사랑이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것은 아니지만, 평범함과 보통의 일상에서 가끔씩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일들이 있기에 우리는 그런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매 순간이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기만 하다면 그런 인생은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그리고 그런 드라마틱한 일들이 일상을 아름답게 비춰주는 조명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면, 사랑은 그 조명들 가운데서도 가장 밝고 예쁜 조명은 아닐까(물론 그래도 현실에서 유부녀를 사랑하는 일은 웬만해선 없는 편이 좋겠다).


천천히 노팅힐을 둘러보고 난 뒤, 그 다음으로 생각했던 어바웃 타임의 두 번째 촬영지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Zorbas라는 그리스식 식당이었는데, 팀과 메리가 '어둠 속의 대화'에서 나온 뒤 처음으로 저녁식사를 먹으며 데이트를 했던 곳이었다.


어바웃 타임의 촬영지인 Zorbas, London

런던 하이드파크 근처의(역시나 부자들만 사는 동네인 것 같은) 주택가에 위치한 이 식당은 사실 풍경이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들어가서 음식을 맛보진 않았지만 구글 리뷰의 식당 평이 좋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들어가서 음식 역시 먹지 않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어바웃 타임에서 둘이 데이트하던 그 식당에서 그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다면 가도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이 장소에서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사진만 찍은 뒤 재빨리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렇듯 상상 속에 있을 때 보다 현실이 더 실망스러운 경우도 종종 있다. 에펠탑을 실제로 봤더니 그냥 거대한 철골 구조물에 불과하다든지(물론 내 이야기는 아니다), 런던아이를 봤더니 그냥 롯데월드 관람차 같달지(이것도 내 이야기는 아니다). 이럴때면 여행은 내게 '너도 알잖아, 모든 게 다 좋을 순 없는 거야'하고 말해주는  듯하다.

나는 식당 근처의 하이드파크를 보며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다음에 내가 가려고 했던 곳은 옥스포드 스트리트였다. 사실 아침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정이 흘러간 탓에 이때부터는 가고자 하는 장소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일단은 아침에 보았던 휑한 리젠트 스트리트와 옥스포트 스트리트를 활기찬 밤에 다시 한번 들러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가는 길에 러브 액츄얼리에서 또 하나의 인상 깊었던 장면인 결혼식 씬을 찍은 Grosvenor교회가 마침 가는 길이었기에 이 교회를 둘러 본 뒤 옥스포드 스트리트를 보는 것으로 이 날의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교회까지는 약 2km쯤 되는 거리를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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