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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07. 2015

나는 홀로 주책 맞게 설렜다

(2014.12.28, in London, UK) - 1

리치몬드의 새벽풍경, London

매일 마주했던 런던의 새벽 풍경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내가 '익숙한 새벽 풍경'이라는 말을 쓰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첫 날이었다. 런던 시각으로 아침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눈이 떠졌다. 한국에서는 절대 이런 적이 없었기에 살짝 어리둥절했다. 시차 적응이 덜 된 탓이거나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에서 며칠을 보낼 생각에 긴장한 탓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런던에서, 그리고 유럽여행 내내 부지런했다. 여행자 신분의 내게 부지런함은 내 존재를 증명해내고 확인해낼 수 있는 수단이었다. 부지런히 걷고 부지런히 관찰하며 부지런히 귀에 담을 때라야 비로소 여행을, 그리고 그 장소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온전히 그 장소를 느꼈을 때라야 비로소 그 장소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홀로 주책 맞게 설렜다. 차디찬 한 겨울 아침 런던의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내가 영국의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다니'라는 생각을 하며 참으려 해도 계속 새어나오는 웃음에 어쩔 줄 몰라하며 설렜다. 나는 설레는 한편 웃기게도, 마치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릴 적 처음으로 혼자 지하철을 타고 서울을 다녀올 때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영국에서의 첫 날 아침, 나는 혼자 지하철을 타고 서울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났던 열 살 남짓의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인터넷으로 찾은 유럽여행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방대했기에 도저히 무엇을 추려야  할지 몰랐던 나는 내가 가려고 마음 먹은 도시의 가장 중요한 여행 포인트,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촬영지들을 스마트폰 지도에 표시해놨더랬다. 그랬기에 스마트폰이 없는 나는 유럽에서 그야말로 세 살 먹은 어린이보다도 못한 길치였다. 여행에서도 데이터의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이미 종이지도가 아닌 스마트폰 지도에 익숙해진 내게 데이터를 맘 놓고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물론 모든 장소를 다 표시해 놓지는 않았고, 그때 그때 즉흥적으로 찾아가기로 마음먹은 곳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스마트폰은 내게 필수적인 여행도구였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런던에서, 그리고 유럽여행에서의 첫 번째 일정은 데이터 유심칩을 사러 가는 것이었다. 전날 숙소에서 인터넷으로 미리 찾아놓은 리젠트 스트리트의 Three 유심칩 매장을 가기로 결정하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인 리치몬드 역으로 향했다.

Hello Richmond, London

그러나 이 날의 일정은 이렇게 꼬이기 시작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숙소 근처에 있는 Richmond시내에도 Three사의 유심칩 매장이 있었다. 심지어 이 상점가는 웬만한 옷가게와 베이커리 등이 전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리젠트 스트리트로 향했다. 일정은 이 때부터 이미 꼬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워털루 스테이션, London

리치몬드에서는 언더그라운드(지하철)가 아닌 오버그라운드라는 우리나라의 경전철 같은 느낌의 기차를 타야 런던 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매일같이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지하철로 통학했던 내게  30분가량 전철을 타는 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는 한국도 아닌 '영국'이지 않은가! 영국 런던의 시민들과 함께 아침 기차를 타고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을 가져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사실, 여행에서는 뭐든지 색다르고 좋게 마련이다(심지어 전철 내의 안내방송 마저도 내가 동경해 마지않는 영국식 발음이라니!).


리치몬드 역에서 런던 센트럴로 진입하기 위해 30분 정도 전철을 타고 도착한 곳은 워털루역이었다. 이 곳에서 내려 리젠트 스트리트까지 가는 길은 여러 방법이 있었지만 나는 일단 역에서 나와 조금 걷기로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빠르고 편하게 다닐 수 있었지만 영국에서, 그리고 유럽여행 내내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보다는 걷기를 선호했다. 한국과는 달리 걸어가며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기한 외국이었기에 이 곳에선 걷는 일 자체가 즐거움이었고 여행이었다.


런던의 건널목은 이렇게나 사랑스럽다, London

런던 시내에 처음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것은 건널목에 표시된 'Look Left'혹은 'Look Right'였다. 런던 사람들이 개인의 사생활을 중요시 생각하고 침범당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도 많지만, 나에게 런던은 따스함으로 기억되는 도시였다. 사람들뿐 아니라 건널목까지 친절하게 왼쪽을 보라며 말해주는 도시라니.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먼 타국에서 온 이방인은 이렇게 작은 것 하나에도 지나치게 감동하곤 한다.


처음 마주한 템즈강변의 모습, London

워털루 브릿지를 건너며 바라본 템즈강의 모습. 저 멀리 런던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는 빅벤과 런던아이가 보인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워털루역에서 리젠트 스트리트까지 그 먼 거리를 걸어가는 일 자체가 첫 날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첫날 이렇게 많이 걸어두었기에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걷고 또 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행자의 일은 결국 끊임없이 걸으며 그 장소를  온몸으로 체득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여행이 끝난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생각해본다.

여행객들은 빨간색 이 층 버스가 보일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셔터를 누르곤 한다. 나 역시도 그랬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사진기 속엔 온통 빨간 버스가 가득했다.


우리는 사진 속에 빨간색 이 층 버스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사진을 어디서 찍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빨간 버스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마치 열대지방의 야자수나 아프리카의 탁 트인 초원을 바라볼 때와 같은 이국적인 느낌을 받곤 한다.

런던의 빨간색 2층 버스와 Underground라는 표지판은 도시의 상징과도 같다, London

이렇게 '런던'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2층으로 되어있는 빨간색의 버스가 그렇고, 동그란 형태의 'Underground'표지판이 그렇다. 어떻게 도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버스나 택시, 지하철 같은 평범한 대중교통들이 됐을까? 생각해보면 교통수단이 그 도시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생활양식이기 때문은 아닐까? 동남아시아의 TukTuk이라 불리는 택시나 페루의 티코 택시, 파리의 (퀴퀴한) 지하철 등, 대중교통은 그 도시의 생활자와 여행자가 가장 밀접하게 맞닿는 공간들 중의 하나이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지만 너무나도 다른 두 존재들. 여행자들은 그 공간에서 생활자였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며 지금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낯설게  재확인한다.(어제까지는 분명 나도 저 사람들처럼 대중교통을 타고 출근했던 것 같은데 내가 지금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마 그것은  이국적이라기보다는 익숙한 것에서 느끼는 낯섦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여행자들은 자기가 떠나온 나라의 그것과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들을 보여주는 대중교통에서 이국의 향기를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리젠트 스트리트의 아침, London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리젠트 스트리트에 도착했다. 런던 최대의 쇼핑가 중의 하나라 불리는 리젠트 스트리트의 아침은 고요했다. 오가는 사람이 몇몇 보이긴 했지만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이 즐비한 이 곳에 아침일찍부터 오는 여행객은 없는  듯했다. 닫혀있는 가게들을 보며 불안한 마음을 안고서 유심칩을 파는 가게에 도착했더니 역시나, 문이 닫혀있었다. 오전 아홉 시에 도착했는데 가게를 여는 시간은 열한 시라고 되어 있었다. 심지어 핸드폰으로 요일을 확인해보니 그 날은 영국 시간으로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에, 더군다나 유럽의 가게들이 일찍 문을 열리 만무했다. 꼼짝없이 문 닫힌 가게들만 빼곡히 있는 리젠트 스트리트를 구경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런던에 도착한지 하루도 채 안됐기 때문에 이국적인 모습의 건물들을 구경하는 일 자체로도 즐거웠지만, 한국에서부터 세웠던 계획이 조금씩 꼬이는 느낌이 들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행은 오늘이 시작이었고, 여행이 언제나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으리라는 것 역시 예상하고 있었기에 조금 더 마음을 느긋하게 갖자고 나 자신을 다잡았다.

리젠트 스트리트, London

리젠트 스트리트 근처에 영화 어바웃 타임(2013)의 촬영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나는 일단 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는 길에 익숙한 녹색의 스타벅스 간판이 있어 간단하게 커피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웠다. 설마 스타벅스 샌드위치가 맛이 없진 않겠지 하면서 한입 베어 물었는데 아뿔싸, 여긴 영국이었다(물론 영국의 모든 음식들이 맛이 없지는 않다. 그리고 영국의 음식이 맛없다는 말 역시 편견이라는 것을 알지만, 적어도 영국 음식들이 다른 유럽에 비해서 특색 없고 맛이 평범한 것은 사실이었다).

About Time(2013)@Newburgh St., London
About Time(2013)@Newburgh St., London

스타벅스에서 처음 사먹은 영국 음식에 회의(?)를 느끼며 어바웃 타임의 촬영지인 영국 소호의 Newburgh Street로 향했다. 이 장소는 어바웃 타임의 두 주인공 메리와 팀이 처음 만나 데이트를 하게 되는 장소로, '어둠 속의 대화'를 하는 가게가 등장하는 곳이다. 그리고 팀이 모태솔로 특유의 찌질함(?)을 발휘해 버벅거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복장을 터지게 하는 명장면을 촬영했던 곳이다. '어둠 속의 대화'라는 곳은 실제로 존재하는 식당이 아니었지만, 거리에 서 있으니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는 남녀 간의 설렘과 팀의 찌질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리젠트 스트리트와 그 옆의 자그마한 소호는 마치 강남대로와 가로수길을 연상케 하는 곳이었다.

리젠트 스트리트 뒷골목(?), London

한참을 그렇게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보니 가게를 연다고 했던 열한 시가 되었다. 다시 유심칩을 파는 가게에 갔더니 한국인으로 보이는 몇 명이 이미 줄을 서 있었다. 그들과 같이 가게에 들어가 점원에게 유심칩을 사러 왔다고 하니, 쿨워터 향을 진하게 풍기며 재고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줬다("We are currently out of stock", "뭐 인마?"). 내가 런던에 있던 시기가 마침 Boxing Day라는 런던의 대규모 세일 기간이었기에 가게들마다 재고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입국한 요일은 주말에, Boxing Day까지 겹치다니, 그야말로 겹경사가 따로 없구만 하하.'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점원이 리버풀 스트리트 스테이션에 있는 가게에는 아마 재고가 있을 것이라며 가보라고 권했다(그래 퍽이나 고맙다). 당황스러운 소식을 접한 나는 일단 가게를 나왔다. 함께 있던 한국인 여자 둘과 이 사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일단 점원이 말해주었던 리버풀 스트리트 스테이션으로 가서 유심칩을 사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오전 일정을 전부 다 바꿔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런 것도 여행의 일부분이었다. 물론 그 당시엔 소위 '멘붕'이었지만. 그리고 여행은 나에게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거야'하고 시작부터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유심칩을 사러 잠시 들렀던 리버풀 스트리트 스테이션의 모습. 워털루 스테이션 만큼이나 큰 역이었다, London

한국인 여행객 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이동하던 나는 혼자서는 심심하기도 했고, 아직은 혼자 다니는 외로움에 익숙해지지 않았기에 오후 일정을 그들과  함께하기로 했다. 그들은 동행을 구하는 인터넷 카페에서 함께 알게 되어 같이 오게 된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 전엔 전혀 모르는 사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 둘이 마치 외계에서라도 온 사람들 같아 보였다. 어떻게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나 같은 사람은 절대 못했을 여행 스타일이라 더 신기했다. 나는 혼자서 다니는 여행이 편했고, 모르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절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여행을 시도해볼 생각 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동행을 구해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또 다른 추억이자 여행의 로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영 내키진 않았지만.


유심칩을 사는데까지의 고생은 이제 그만 얘기하기로 하자. 어쨌든 리버풀 스트리트 스테이션에서는 다행히도 아직 유심칩 재고가 남아있었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손짓 발짓과 짧은 영어를 써가며 유심칩을 샀다. 그리고 앞으로 유럽에서 이 유심칩이 무사히 작동하기를 바라며 본격적으로 런던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잡은 첫 날의 첫 번째 목적지는 동명의 영화 제목으로도 유명한 노팅힐(Notting Hill)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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