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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04. 2015

여행의 시작, 그 설렘을 안고서

(2014.12.27, Incheon to London)

인천공항에서, Incheon

아침부터 조금 서둘렀다. 전날 미리 짐을 챙겨놓긴 했었지만 처음 가는 긴 해외여행에 나는 촌스럽게 설레고 있었다. 이렇게 서두른 탓에 공항에는 비행기 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도착했다. 원체 성격이 늦기보다 차라리 일찍 가서 기다리는걸 선호해서 일찍 도착한 것이 싫다거나 하진 않았다. 이런저런 탑승수속을 밟고 가족과 인사를 나눈 뒤 게이트 앞에 도착하니 이륙시간까지는 한 시간 가량이 남아있었다. 무료한 시간은 사진을 찍고 인터넷을 뒤적 거려도 쉽게 지나가지 않았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혼자 하는 여행의 핵심은 혼자만의 무료하고도 고독한 긴 시간들은 감내하는 일이었다. 그런 시간들에 익숙해져야만 비로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들을 꾸역꾸역 버티어낸 끝에 ㅡ알랭 드 보통의 말을 빌리자면ㅡ 리듬마저도 아름다운 "런던행 KE907"의 탑승을 알리는 경쾌한 안내방송과 함께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장시간의 비행에서는 창가석에 앉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가장 큰 이유는 화장실을 이용하기 불편하기 때문이다(옆 사람에게 계속해서 '죄송합니다'를 연발해야 하는 상황은 참 피곤하다). 하지만 오직 비행기 창 밖을 봐야만 느낄 수 있는 그 비현실적인 풍경은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그 비현실적인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처한 비현실적인 상황(육중한 쇳덩이 안에 앉아 몇 천 피트 상공에 떠있다는)과 결합하면서 여행을 더욱더 환상적인 것으로 만들어주곤 한다.


여행이 꿈으로의 여정이자 현실을 벗어나는 행위라면 그 시작은 이렇듯 비행기의 비현실적인 창 밖 풍경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창가에 앉는 것이 참 좋았다. 노을 지는 하늘과, 해가 떠오르는 하늘을 비행을 하면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신비로움에 감탄하곤 했다. 그래서 비행 내내 창밖을 보고 있어도 심심하지 않았다(물론 화장실을 참느라 그 좋아하는 맥주를 얼마 못 마시는 상황은 좀 괴로웠다).


하지만 이 모든 설렘에도 불구하고 유럽으로 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지루한 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코노미석의 좁은 좌석에 앉아서 12시간이 넘는 비행을 견뎌내는 일은 '사람이 움직임이 제한된 채로 앉아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의 극한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마치 납치·감금된 사람들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이나마 들었다가, 곧바로 '그래도 나는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들을 수 있다'는 아주 멍청한 위안거리를 생각해냈다.


비행기를 타고 창가석에 앉으면, 바깥으로 흘러가는 구름들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것 같았지만 슬슬 창 밖의 적란운들이 지겨워지고 있었다. 노트북에 받아두었던 영화를 세 편 씩이나 봤음에도 도착지인 런던까지는 두 시간 가량이 더 남아있었다.


런던행 비행기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기내는 조금 더웠고, 기내식을 먹었음에도 배가 조금 고팠다. 게다가 첫 장시간 비행으로 인해 긴장한 탓이었는지 식은땀을 좀 흘렸다. 그 와중에 핸드폰과 노트북에 표시된 비행기 모드는 내가 몇 천 피트 상공에 떠 있는 상태임을 현실감 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하늘에 떠 있는 이 커다란 쇳덩이가 거의 미동도 없이 떠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감탄할  때쯤, 기내에서 방송이 들렸다. 런던에 거의 도착했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이었다. 저 멀리 창밖으로 런던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짙은 하얀색 기체들로 뒤덮여있는 모습은 과연 말로만 듣던 런던의 날씨 그대로였다. 저 멀리 런던의 상징인 런던아이가 얼핏 보였다. 기체가 조금 흔들렸다.

구름 속의 런던, London

히드로 공항에 내린 뒤 입국심사를 마치고 터미널에서 나오자, 커피 향이 진하게 풍겨져 왔다. 아마도 터미널 앞에 커피전문점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누구에게나 특정 장소를 기억하는 특정한 방법들이 있게 마련인데, 가끔 후각은 시각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되기도 한다. 마치 내가 런던의 히드로 공항을 커피 향으로 기억하듯이 말이다. 히드로 공항에서 나는 앞으로도 이 장소를 커피 향의 공항으로 기억하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이국적인 안내판, London

예약한 숙소 주인이 공항으로 직접 마중을 나오기로 되어 있었던 터라 나는 잠시 히드로 공항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 곳은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었다. 한글로 된 익숙한 안내판이 아닌, 온통 영어로 된 안내판부터 나를 기죽게 만들었다.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왔다는 그 이질적인 느낌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내가 해외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들은 빅벤이나 에펠탑 같은 랜드마크가 아니라 한낱 공항의 안내판이 될 수도 있었다. 공항의 안내판이야말로 진정 이국적인 외국의 상징물이었다.


공항 터미널에서 숙소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여행에서 데이터 사용을 위해 쓸 유심칩을 사려고 했으나 파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유심칩을 팔고 있는 듯 한 자판기가 보였지만 내가 사려고 했던 회사의 유심칩은 없는  듯했다. 있었더라도 아마 그것이 내가 사려는 유심칩인 줄 몰랐을 테다(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실제로 팔고 있었다). 런던 내에서 교통카드처럼 쓰이는 오이스터(Oyster) 카드를 파는 곳도 딱히 보이지 않아, 나는 영락없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이곳저곳 두리번 거리며 돌아다니게 되었다. 돌아다니는 것도 지친 나는 작은 편의점에 들어가 음료수를 하나 사서 마시고, 공항의 모습을 사진기로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그것도 금세 지루해져 그냥 멍하니 벤치에서 앉아 숙소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12시간을 꼼짝없이 앉아서 지

히드로 공항의 모습, London

루한 비행을 끝내고 비행기에서 내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공항에 나왔더니,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공항에서 갈 곳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놓여있으면 누구라도 기분이 외롭고 쓸쓸해지게 마련이다. 혼자 여행을 해 본 적은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먼 곳으로 장시간 여행을 떠나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 쓸쓸함은 곧 배가 되었다. 어쩐지 이번 여행은 내내 외로움과의 싸움이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숙소를 예약했던 애플리케이션으로 연락이 왔고, 곧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젊었다. 짧게 인사를 나눈 우리는 곧바로 차에 올라타서 이런 저런 얘기를 시작했다. 이제 곧  서른한 살이 된다는 그는 지금의 아내와 영국 유학을 하면서 유럽  이곳저곳으로 배낭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했다. 그는  그때 자기처럼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묵었다가는 숙소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 부럽고 재밌어 보여, 자기도 사람들에게 방을 빌려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는 동안은 내가 아직도 서울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공항에서 느꼈던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느낌도 잠시, 어느새 다시 현실감각이 떨어진 나는 '내가 지금 영국 런던에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순간 '세상 어디를 가든 도로는 다 비슷비슷하구나'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했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는 어느덧 숙소에 도착했다.


그는 앞으로 내가 런던에서 묵게 될 숙소, 그리고 자기 집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한 뒤, 나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칠면조 요리를 먹는 전통이 있다며, 비록 크리스마스는 이틀이 지났지만 지난 크리스마스에 먹지 못한 칠면조가 있어 오늘 저녁에 만들어먹을 예정이라고 했다. 근처의 식당을 찾아보기엔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인데다 숙소 주변에 식당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주인집 부부와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어 진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런던에서의 숙소, London

그렇게 인사를 나눈 뒤 방에 들어가 따뜻하고 서걱거리는 이불속에 들어가자, 시차적응이 되지 않은데다 오랜 비행 탓으로 피곤해진 몸이 금방 무너져 내렸다. 짐을 대충 풀고 난 뒤 샤워를 하고 나와 내일부터 런던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계획을 세우던 중에 까무룩 잠이 들었고, 일어나 보니 어느덧 약속한 저녁시간이 되어 있었다. 주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 주인집 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나니, 거실엔 또 다른 한국인 부부가 도착해 있었다.

칠면조 안에 들어가는 스터핑

이 요리가 보통 칠면조 요리를 할 때 칠면조의 배를 가르고 그 속에 채워 넣는 스터핑이라고 한다. 다진 고기와 당근 등의 각종 야채로 만든 요리인데, 칠면조 속에 넣으면 잘 익지 않아서 이렇게 따로 먹는 편이 훨씬 더 조리하기에 편하다고 아내분께서 말씀하셨다.

칠면조 요리

이것이 바로 플레이팅 한 칠면조 요리의 모습. 칠면조는 내가 생각한 모습보다 훨씬 더 큰 모습이었다. 다섯 명이서 한 마리를 다 먹지도 못하고 남길 정도로 한 마리의 양은 실로 엄청났다.


이렇게 먼 타지에서의 첫 날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으니 좀 전의 외롭고 쓸쓸했던 마음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나는 두 부부와 함께 영국이라는 나라와 런던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그리워하는 한국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이렇게나 운 좋게 만난 따뜻한 사람들 덕분에 런던에서의 첫날 밤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도 좋게 남아있다. 여행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그때의 시간과 공기, 그리고 그 장소의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렇게, 긴 여행의 첫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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