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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May 16. 2017

꿈의 폐곡선

Scene in the cinema - 싱 스트리트, 더블린

폐곡선(閉曲線): 한 곡선상에서 한 점이 한 방향으로 움직여,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곡선. 원(圓) 따위.


꿈이라는 단어는 늘 사람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사람들은 언제나 꿈을 이야기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꿈은 때로 사람을 좌절시키기도 한다. 이루지 못한 꿈은 오히려 사람을 옥죄어 꿈에 갇히게 하고, 상대적 박탈감과 좌절감에 휩싸이게 한다. 꿈이 가진 양면성이다. 이러한 양면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꿈은 늘 곧게 뻗은 일직선이 아니라 일정한 폐곡선을 그리며 움직인다. 인생이라는 폐곡선 위에 찍힌 꿈이라는 점은 조금씩 움직이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제자리로 돌아온다. 꿈을 이룬 자에게는 그 꿈 너머에 또 다른 꿈이 생겨나고, 이루지 못한 자의 꿈은 돌고 돌아 폐곡선 위를 한없이 움직인다. 꿈은 얼핏 저 멀리 사라져 버린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다. 그렇게 꿈이라는 존재는 폐곡선을 그리며 늘 우리 주위를 맴돈다.


음악을 좋아했던 형은 늘 꿈을 꿨다. 유명한 뮤지션이 되어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현실 속의 그는 대학을 자퇴한 뒤 집에서 헛된 꿈을 꾸는 한낱 몽상가일 뿐이었다. 그런 형을 보고 자란 동생 역시 은연중에 음악을 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형제는 같은 꿈을 꿨다. 그러나 꿈의 방향은 사뭇 달랐다. 동생은 직접 밴드를 결성하고, 음악을 만들었으며 사랑하는 여자와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자신의 형이 처절한 패배감에 휩싸여있는 동안.

존 카니 감독의 2016년 작품 <싱 스트리트(Sing Street)>는 꿈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영화다. 그는 원스에서부터 비긴 어게인에 이르기까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갖고 있는 저마다의 꿈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싱 스트리트에서는 꿈을 말하는 그의 화법이 조금 다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동생인 코너지만, 동생의 꿈은 형인 브랜든을 통해서만 비로소 완성된다. 동생은 자신이 우상처럼 여겼던 형에게 인정받길 원했다. 그렇게 음악을 시작했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늘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던 꿈을 실현시켜나가는 동생을 보며 패배감을 느낀다. 형처럼 되고자 했던 동생은 그런 형의 모습을 보며 슬퍼한다. 형제의 꿈은 폐곡선 위를 한없이 움직인다. 이 영화는 꿈의 지독한 폐곡선에 관해 이야기한다.


영화의 시작은 그리 희망차지 않다. 주인공 코너는 방에서 기타를 치고 있고, 그 뒤로는 부모님이 서로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1985년의 아일랜드는 경제위기로 인해 실업자는 급증하고 사람들의 삶은 팍팍했던 시기였다. 더블린 사람들은 돈이 없어도 희망을 꿈꾸며 무작정 런던으로 향했다. 영화는 이 암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영화 속 아버지의 대사처럼 '희망찬 상황'은 결코 아니다. 코너의 가족은 코너에게 '예산 삭감'이라는 이유로 '싱 스트리트 크리스천 브라더스 스쿨'로 전학을 가게 한다. 코너에게 다른 선택권은 없다.


코너가 전학 온 학교는 원래 그가 다니던 학교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그가 학교 정문에 발을 들이자마자 본 풍경은 가톨릭 학교임에도 패싸움을 하며 흡연을 하는 학생들과 그 광경을 건조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수사 벡스터 교장의 모습이었다. 코너는 학교에 온 첫날부터 배리라는 험상궂은 학생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벡스터 교장에게선 신발색이 검은색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취급당한다. 새로운 학교는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주인공 코너가 전학 간 곳으로 나오는 '싱 스트리트 크리스천 브라더스 스쿨'은 실제로 더블린의 Synge Street에 위치한 학교다. 이 학교는 존 카니 감독의 실제 모교로, 지금 현재는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수사가 학생을 부당하게 괴롭히고, 학생들은 매일같이 싸우며 담배를 피우는 학교는 아니라고 한다(영화의 마지막에 올라오는 크레딧에서는 이 학교가 작품 내에서 묘사된 것과는 달리 진보적인 교육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다문화주의를 추구하고 있다고 나온다.). 음악영화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감독이 나온 학교와 거리의 이름에 노래를 뜻하는 영어단어 sing과 발음이 비슷한 단어가 들어간다는 사실은, 그곳을 찾은 영화 팬이 괜한 의미를 부여하기에 좋았다. 나는 이 우연의 일치를 마치 혼자만 아는 사실이라도 된 것처럼 작게 흥분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일요일이어서 그랬는지 학생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학생들이 없는 학교는 고요했다. 영화 속에 나왔던 시끌벅적한 학교와 같은 장소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저 삭막한 회백색의 콘크리트 건물이었음에도, 영화 속에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였다. 내 곁을 지나가던 더블린 사람들은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너 그 영화 때문에 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학교에서의 폭풍 같은 하루를 끝내고 집에 돌아온 코너는 형과 함께 TV에서 나오는 듀란듀란의 'Rio'뮤직비디오를 시청한다. 형은 그에게 듀란듀란의 음악과 뮤직비디오에 대해 열에 들떠서 설명한다. 이 장면에서 형을 향한 코너의 눈은 존경심으로 반짝인다. 그에게 비친 형의 모습은 아는 것도 많고 똑 부러지게 자기 할 말도 할 줄 아는 멋진 사람이다. 유약하고 자기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과는 다른 형의 모습을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이 형을 바라보는 코너의 표정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종종 우리 삶에선 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안정적인 순간이 아니라 구석에 몰리고 벼랑 끝에 다다른 그 순간에라야 간절하게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싱 스트리트의 주인공 코너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가 전학을 가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의 스토리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코너는 모두가 나를 향해 등을 돌리고 외면하는 것만 같은 그 순간에, 그런 세상을 향해 '내가 이렇게 멋진 사람이다'라며 소리치기 위해 음악을 시작한다. 그에게 멋진 사람이란, 형처럼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고 자신 있게 본인의 얘기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동생의 꿈은 어쩌면 음악이 아니라 형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코너가 그런 마음을 가진다고 해서 사정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튿날도 여전히 코너는 벡스터 교장에게 단지 신발 색을 이유로 혼이 나고, 배리는 학생식당에서 코너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면서 면박을 준다. 맞은 얼굴을 부여잡고 아파하는 코너. 그때 갑자기 다렌이 다가온다. 모든 상황을 구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렌은 코너에게 학교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며 충고한다. 그들이 학교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정문을 나온 순간, 길 건너편에는 담배를 물고 서 있는 라피나가 있었다.

라피나에게 첫눈에 반한 코너는 그녀에게 본인이 밴드를 하고 있다며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달라는 얼토당토않은 거짓말과 함께 전화번호를 얻어낸다. 코너는 본인이 저지른 거짓말을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그리고 첫눈에 반한 라피나와 함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 위해서 그는 다렌과 함께 밴드 멤버를 찾기 시작한다. 그렇게 에이먼과 잉기, 래리, 개리 등의 멤버를 찾아 창고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며 결성하게 된 밴드 '싱 스트리트(sing street)'. 멤버들은 그들의 첫 노래로 앞에 나왔던 듀란듀란의 Rio를 커버 곡으로 녹음한다. 우리의 운명은 때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충동적인 행동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코너가 단순히 자신이 첫눈에 반한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했던 거짓말은 그 안에 내재해 있었던 '음악'에 대한 꿈을 조금씩 끄집어낸다.


그러나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들려준 노래에 대한 형의 반응은 싸늘하다. 브랜든은 '지독한 냄새를 빼야겠어'라며 방문을 열며 코너에게 본인의 노래를 쓰고, 연주하라고 말한다. 형은 동생에게 본인의 말을 하지 않는 밴드는 커버 밴드에 불과하다며 다그친다. 두 형제는 음악을 통해 서로 교감한다. 둘은 밤을 새워 노래 가사를 함께 써 내려간다. 이렇게 형이 이루지 못한 채 간직하고 있었던 음악이라는 꿈을 향해 동생은 형과 함께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어쩌면 형에게는 코너에게 있었던 절박함과, 어처구니없는 충동적 실수라는 꿈의 촉매제가 없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Rock 'n' Roll is a risk. You risk being ridiculed


다음날, 형과 함께 만든 가사를 에이먼에게 보여주는 코너. 둘은 그 가사에 한음 한음 붙여가며 곡을 완성한다. 그렇게 그들의 첫 곡 '수수께끼의 모델(The Riddle of the model)'이 탄생한다.

코너는 라피나에게 다시 찾아가 드디어 완성된 본인의 첫 곡이 담긴 테이프를 건넨다. 그리고 라피나에게 뮤직비디오 촬영 날짜와 장소를 알려준다. 라피나는 '정말로 이 꼬맹이가 다시 올 줄은 몰랐는데'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어쩌면 그녀는 코너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늘 사랑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솔직해진다.

영화 속에서 라피나가 지낸 곳으로 나오던 기숙사는 학교 앞에 위치한 일반적인 가정집이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돌계단과 난간을 보며 라피나가 시크하게 앉아서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반해 그녀에게 다가오던 한 소년을 떠올렸다. 늘 그렇듯이 영화 속 촬영지를 다니는 여행은 장소에 대한 상상력과 때로는 과한 의미부여가 필요하다. 겉으로 보기엔 별것 아닌 거리와 건물들을 목적으로 떠나는 여행. 그런 여행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은 오직 영화 속 한 장면이다.


싱 스트리트 밴드와 라피나와의 첫 번째 뮤직비디오 촬영은 풋풋하고 미숙하지만, 나름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그들은 다 함께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헤어진다. 늦은 저녁, 코너는 라피나에게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말한다. 물론 차가 아닌 자전거로 말이다.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코너의 마음은 한껏 들떠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일은 늘 그렇듯이 설레고도 기분 좋은 일일 테다. 그러나 그 설렘도 잠시, 어디선가 울리는 경적소리가 고조된 분위기를 뚫고 들려온다. 그녀를 보러 온 남자 친구다. 라피나는 남자 친구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코너를 소개한다. 그녀가 들려준 코너의 노래가 좋았다며 말하는 남자. 둘은 이윽고 차를 타고 떠난다.


사랑하는 여자를 생각하며 쓴 곡을 그녀가 남자 친구에게 들려줬다는 사실은 코너에게 적잖은 상처였다. 그리고 그 상처는 자신의 벌거벗겨진 감정을 상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봤다는 부끄러움과 함께 왔을 테다. 때로 상대방을 향한 내 마음의 무게를 상대방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내 마음이 가볍게 다뤄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늘 괴롭다. 서로를 향한 감정의 무게는 평형을 이루는 양팔 저울이 아니라 항상 한쪽으로 기우는 시소와 같다.

그러나 코너는 음악을 통해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의 남자 친구를 보고 실망한 그는 함께 뮤직비디오를 보고 난 뒤 형이 건네준 LP판을 들고 에이먼의 집으로 간다. 이전 같았다면 그저 속으로 삼켰을 감정을 코너는 그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그대로 가사로 옮긴다. 라피나는 이미 그에게 뮤즈였다. 뮤즈는 예술가에게 있어 필수적인 존재다. 뮤즈라는 존재가 주는 영감 속에는 기쁨의 감정과 슬픔의 감정이 함께 들어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의 첫인상을 토대로 만든 노래가 'The riddle of the model'이었다면, 새롭게 만든 노래 'Up'은 첫 만남 뒤로 그녀를 통해 느낀 그동안의 감정과, 그 날의 슬픔까지도 담은 곡이었다. 감정을 노래로 승화시키기 시작한 코너는 이미 탁월한 뮤지션이었다. 그는 음악을 통해 조금씩 변해나가고 있었다.


Going up, She lights me up, She breaks me up, She lifts me up.


영화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슬프면서도 빛나는 장면이었다. 코너가 노래를 통해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켜나가는 과정이나, 집에서 코너의 노래를 들으며 짙은 화장을 지우는 라피나의 슬픔과 기쁨이 범벅된 표정은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그 장면에서 두 주인공은 마치 라피나가 화장을 지우듯 꾸미지 않은 맨 얼굴의 벅찬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노래가 가진 힘이었다.

노래를 들은 다음 날, 그녀는 학교 앞에서 코너를 기다린다. 라피나는 그를 향해 '코스모'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른다. 라피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를 만난 뒤 코너가 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코스모라는 이름은 그저 코너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라피나는 남자 친구와 함께 런던으로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코너, 아니 이젠 코스모에게 그녀는 날 위해 가끔은 행복한 노래를 불러 달라고 말한다. 슬픔이 아닌 기쁨의 노래를. 코너가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반문하자 라피나는 이렇게 말한다.


너의 문제는 슬픔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나 사랑은 슬픔이야. 행복한 슬픔.


라피나와 짧은 만남을 가진 뒤 코스모는 그녀가 해준 행복한 슬픔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형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다.


그녀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야. 그런 여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말투나 외모 등. 선글라스를 벗으면, 그녀의 눈은 달을 지나가는 깨끗한 구름 같아. 가끔은 그녀를 보고 울고 싶어져.


이때, 코너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향한 자기 자신의 감정은 이미 "행복한 슬픔"이었다는 것을.

코너와 라피나가 만난 공원은 St Catherine's Church of Ireland에 딸린 작은 뒷마당인 St Catherine's Park였다. 아쉽게도 공원 문은 굳게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실제 공원은 영화에서 둘이 천천히 걸으며 한 바퀴를 도는데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던 것처럼 작은 곳이었다. 공원에는 작은 길 하나만 나 있었다. 오후의 해는 듬성듬성 솟아있는 누군가의 무덤을 비추고 있었다. 라피나가 말했던 '행복한 슬픔'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말했던 행복한 슬픔은 단지 코너의 생각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싱 스트리트 밴드 멤버들의 생각에도 영향을 준다. 이제 그들은 그저 듣기 좋고 그럴싸한 음악이 아니라 밴드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음악적 방향성에 대한 철학을 고민한다. 밴드는 코너의 성장과 함께 커가고 있었다.

며칠 뒤, 새롭게 만든 'A Beautiful Sea'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 위해 밴드 멤버들과 라피나는 DART라는 이름의 철도를 타고 던리어리(Dun Laoghaire)에 위치한 바다로 향한다.


DART(Dublin Area Rapid Transit)는 기차라고 하기엔 좀 작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지하철 1호선 정도의 노선을 가진 전철로서, 더블린 시내에서 비교적 먼 곳까지 운행하는 대중교통이다. 다트는 싱 스트리트 영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근교로 나갈 때 이용하기 좋은 교통수단이다. 던리어리로 가기 위해 올라탔던 다트의 의자 색깔은 영화에서 나왔던 것처럼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녹색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트를 타고 가면서 창 너머로 보이던 담벼락의 그래피티라든지, 던리어리 항구의 돌담에 있는 부분 보수의 흔적까지 장소들은 내가 봤던 영화 속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렇게 싱 스트리트의 촬영지들은 그동안 다녔던 영화들과는 다르게, 비교적 최근에 나온 영화라서 그런지 아직 변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모습을 대부분은 유지하고 있는 편이었지만, 아주 작은 부분까지 비슷한 광경들은 영화 속 장면과 실제의 모습을 세세히 뜯어가며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내게있어 던리어리 항구에서 멤버들이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던 모습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코너가 본인이 생각하는 뮤직비디오의 대본을 라피나에게 설명하자, 라피나를 비롯한 밴드 멤버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물에 뛰어드는 시늉만 하라고 지시하는 코너의 이야기를 들은 뒤, 라피나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물을 한번 쳐다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촬영에서 라피나는 뛰어드는 시늉이 아니라 실제로 물로 뛰어든다. 수영을 할 줄 모른다며 살려달라고 발버둥치는 라피나를 구해주고 코너는 왜 물로 뛰어들었냐며 물어본다. 그런 그에게 라피나는 이렇게 말한다.


For our art Cosmo! You can never do anything by half!


나는 이 문장이 싱 스트리트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대충하지 말라며 다그치는 라피나의 말은 결국 코스모, 코너를 향해서 외치는 말이기도 했지만 본인 자신에게 외치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감독이 세상의 모든 꿈에 외치는 문장이기도 했다. 네가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절대로 대충하지 말라는 외침.


이 영화를 처음 봤던 때의 나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 고민 중이었다. 회사에 다니면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온전히 할 수 없었다. 나는 어영부영 현실과 타협해서 "이 정도면 그래도 내가 하고 싶어 했던 것들과 비슷하니까"하고 생각해버리며 넘기곤 했다. 그렇게 회피하지 않는다면 그때의 현실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때의 나는 늘 혼자서 "어쩔 수 없지 뭐"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나 감독은 알고 있었다. 꿈은 절대로 멀리 사라져버리지 않는다는 걸, 당신이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할 때마다 꿈은 멀리 가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돌고 돌아 다시 당신 옆에 와서 서 있다는 걸. 라피나의 그 대사는 마치 존 카니 감독이 영화를 통해 나에게 말하는 듯했다. 폐곡선을 그리는 꿈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내 옆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이 영화의 촬영 장소를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났을 때의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라피나의 그 한 문장이 7개월 뒤의 나를 그만두게 하진 않았지만, 라피나의 대사를 들은 뒤부터 나는 조금 더 꿈이라는 간질간질한 단어에 대해 충실해질 수 있었다. 절대로 대충하지 말라는 말, 반만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녀의 말은 항상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장면이 촬영됐던 던리어리 항구는 굳이 싱스트리트를 위한 여행이 아니더라도 아일랜드를 여행 왔다면 한 번쯤 가볼 만한 곳이다. 해 질 녘에 마주한 항구는 시간과 빛이 주는 특유의 색감에 둘러싸여 포근했다. 바닷가에 반사된 하늘빛은 신비로웠고, 내 옆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나 역시 내게 인생에 있어 큰 의미로 다가온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촬영한 장소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말투, 행동들 하나하나가 사랑의 감정을 보임에도 둘 사이는 늘 아슬아슬하게 선회하는 비행기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흘러간다. 유명한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남자 친구와 함께 런던으로 가야 하는 라피나는 코너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매번 억지로 다잡고, 코너 역시 그런 그녀를 알기에 늘 적당히 주위를 맴돈다. 형이 자신의 꿈을 위해 독일로 가고자 했지만, 엄마의 반대로 실패했던 것을 본 코너는, 행복해지기 위해선 그녀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둘 사이를 발목 잡는 건 또 다른 현실이다. 라피나의 남자 친구는 '어른'이고 코너는 '어린애'라는 말도 안 되는 사실이 둘 사이의 감정을 가로막는다. 코너는 어른이 아닌 자신은 그녀를 런던으로 보내줄 수도, 함께 갈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욕심으로 그녀를 붙잡아두면 불행해질 거란 것을 아는 코너는 그녀에게 떠나지 말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배려는 때로 "사랑해서 보내준다"라는 기이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복잡다단한 영역을 제외한다면 코너는 이미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음악을 계속해나가며 완벽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어느 날, 등굣길에 자신을 괴롭히던 배리가 또다시 밴드를 갖고 비아냥거리자 그는 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넌 그저 내 노래의 재료일 뿐이야. 때려봐 배리.
넌 무언가를 부술 줄만 알았지 만들 줄은 모르잖아.


이건 세상의 모든 폭력을 향한 예술의 외침과도 같다. 예술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인 동시에 폭력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세상의 모든 곳에 새로운 무언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행위이기도 하다. 예술에 있어서 폭력과 억압들은 그저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


그에게 한방 멋지게 먹인 코너와 싱 스트리트 밴드는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낼'준비를 한다. 바로 교내 강당에서 열리는 학기말 디스코에서의 첫 공연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코너의 뮤즈나 다름없었던 라피나는 런던으로 떠났고, 부모님은 이혼을 얘기하고 있었으며 형은 코너를 향해 분노를 폭발한다. '너는 그저 내가 힘들게 닦아 놓은 길을 뒤따라 온 것일 뿐이야'라며 코너에게 소리치는 형. 그는 코너가 음악을 통해 변해가는 과정을 보며 가장 많은 질투심과 좌절감을 느꼈을 사람이었다. 영화가 만약 우리의 전체 인생을 간략하게 압축해놓은 이야기라면, 이와 같은 갈등들은 늘 우리가 꿈을 꾸고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익숙한 인생의 장애물과도 같다.


불행은 늘 바닷가의 몰려오는 파도와도 같아서 한 번에 절대 한 가지의 불행만 오지 않는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파도에 무너져 모두 폐허로 변해가는 것 같고, 내 꿈을 위한 동력으로 주변 사람들이 소모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길을 잃은 우리가 그 위에서 길을 찾는 법은, 바다가 잠잠 해질 때까지 결국 기다리는 일이다. 조바심에 못 이겨 바다로 나간다면 우리는 몰려오는 파도에 떠밀려 더 먼 육지로 쓸려가곤 한다. 코너에게 몰린 모든 불행의 열쇠는 코너만이 쥐고 있었고,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


영화 속 코너가 강당에서 'Drive it like you stole it'을 부를 때 나오는 상상 속의 장면들은 그래서 더더욱 슬프다. 코너가 생각한 대로였다면, 지금 이 자리에선 라피나와 함께 뮤직비디오를 촬영해야 했고, 부모님의 사이는 화목해야 했으며, 형은 늘 그가 봐왔던 것처럼 자신감에 넘치는 당당한 모습이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15살 코너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현실에선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파도처럼 몰아닥쳤다.

코너는 답답한 마음에 그녀와 처음 키스를 나눴던 던리어리 항으로 향한다. 그는 그곳에서 나지막이 노래를 부른다. 그날따라 날씨는 화창했고, 그가 라피나에게 얘기했던 것처럼 바다 건너에는 어렴풋이 영국이 보였다. 아마도 그녀가 있을 땅이었다. 그러나 바다 건너 영국은 너무도 멀리 있어 코너에겐 닿을 수 없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돌아오는 길에, 쓸쓸하게 라피나의 옛 기숙사를 지나던 코너는 우연히 라피나를 마주친다. 그녀는 처음엔 본인이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이내 인정하고 코너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런던으로 함께 따라갔던 남자 친구는 사실 어른인 척 흉내 내는 애송이일 뿐이었으며, 그곳에는 아는 사람도 없었고 남자 친구 역시 가진 것 없는 한심한 놈이었다는 것을. 자신의 꿈이 좌절된 라피나는 분노에 휩싸여 코너에게도 그 화를 쏟아낸다.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지금 15살 꼬맹이와 어울리고 있으며 한낱 맥도널드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다는 현실에 분노한다. 코너의 눈엔 항상 반짝이던 그녀가 변해버린 모습을 보고 실망해서 자리를 뜬다.


코너에게 있어 꿈의 동력은 자신보다도 늘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에겐 언제나 아는 것 많고 멋진 형이 있었으며, 눈동자를 반짝이며 함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고 자신의 음악에 영감을 주던 라피나가 있었다. 그러나 코너가 그들을 통해 꿈을 키워나가고 더 멋진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동안 오히려 자신을 멋진 사람으로 변화시키던 존재들은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어쩌면 꿈의 동력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단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코너에게 있어서 그의 꿈은 음악이라기보단 사랑하는 여자에겐 멋진 남자로 비치는 것이었고, 그에게 있어 그런 멋진 남자는 곧 형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음악은 그런 근사한 나 자신을 만드는 도구였다.


그러나 코너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는다. 이제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주던 존재들에게 반대로 영향을 주는 존재로 변해있었다. 코너는 오롯이 홀로 서서 다른 이들의 꿈을 응원하는 존재로 변했다. 영화 같은, 영화에 의한 한 소년의 완벽한 성장기다.

그렇게 오롯이 홀로 서기에 성공한 소년은 밴드 싱 스트리트로 선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할아버지의 작은 보트를 타고 라피나와 함께 웨일스로 떠난다. 형은 동생이 그 동안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다시 옛 꿈을 되살려 노래를 만들기 시작하고, 사랑하는 여자는 그와 함께 미지의 세계로 떠나 다시 한번 꿈을 향한 항해를 시작한다.

For Brothers Everywhere


영화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말은 이 한 문장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우리는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형의 입장에서 코너를 응원하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동생을 떠나보내며 소리치는 브랜든의 모습에서 관객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꿈을 꾸는 사람은 존재 자체로도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 사람을 응원하며 우리는 다시 한번 살아갈 동력을 얻는다. 코너가 그랬고, 라피나가 그랬으며, 그의 형 브랜든이 그랬듯이 말이다.


사람들은 꿈을 이룬 이들을 보며 찬양하기 바쁘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봐야 할 것은 꿈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 그 길 위에서 좌절했거나, 혹은 지금 그 길 위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꿈은 폐곡선을 이루며 끝없이 움직인다. 꿈을 이룬 존재가 다른 꿈을 좇아 떠날 때,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존재 옆엔 어느덧 폐곡선을 돌아온, 잊고 있었던 꿈이 서 있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영화가 끝난 뒤에, 폐곡선을 돌아 어느새 다시 한번 자신의 옆으로 돌아온 꿈을 쳐다보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 영화는 노력을 부정당하고 꿈을 꾸다 좌절해버린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가족 안에서 희생해야만 했던 세상의 모든 보통의 존재들을 향한 감독의 응원은 아니었을까.


영화 <싱 스트리트>의 촬영지를 찾아다니며 사방을 누볐던 더블린은 그런 이야기의 배경이 되기엔 더없이 완벽한 장소였다. 사람들은 길이든 펍이든 집이든 늘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의 노래는 곧 꿈이었다. 더블린은 노래를 통해 꿈을 이야기하는 도시였다.

https://www.instagram.com/jw_yoon_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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