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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Jul 17. 2017

평범한 날들 속의 어떤 강조점

Scene in the cinema - 원스(Once), 더블린

율리시스를 쓴 제임스 조이스와 오스카 와일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의 문호를 배출한 나라, U2와 Cranberries, The Script, Damien rice 등의 유명한 뮤지션들을 배출한 곳. 영국과의 오랜 갈등을 겪은 아픔을 갖고 있는 나라. 기네스의 본고장이자, 아이리쉬 커피의 탄생지.


이처럼 아일랜드 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두서없이 나열해도 아마 A4 용지 한장은 족히 채울 수 있을 테지만, 그 수많은 이미지들 중에서도 특히 내게 아일랜드는 영화'원스(Once)'의 배경이 된 나라이자 존 카니 감독의 나라였다. 내게 "아일랜드를 생각한다"는 것은 곧 "영화 원스를 생각한다"는 말의 동어반복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 더블린의 모습은 여행의 목적지로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러닝타임 내내 화면 속에 나오는 하늘은 거의 회색에 가까운 잿빛을 띄고 있었고, 도시는 모노크롬의 그것에 더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직 원스라는 영화 하나만으로 이 도시에 완벽하게 매료되어버렸다.


그러나 혼자서 영화를 몇 번씩 돌려 보며 스스로에게 과한 의미를 부여해버린 탓에, 내게 더블린은 어떤 종교적인 성지 같은 곳이 되어있었다.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채 그곳에 간다면, 그동안 내가 영화를 보며 차곡차곡 쌓아왔던 이미지가 허무하게 무너지며 현실로 다가올 것 같았다. 이상이나 환상이 현실이라는 삶의 영역이 아니라 미지의 영역에 남아있을 때만 본연의 빛을 갖는 것과 비슷하달까.


그런 비논리적인 이유들을 핑계로 더블린으로의 여행을 늘 미뤄오던 나는, 1년 반 가량 다녔던 첫 회사에서의 생활을 정리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지금이 더블린에 가야 할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 후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촬영지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타이틀은 괜한 의미부여를 하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그렇게 더블린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나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한번 영화 원스를 봤다. 너무 많이 봐서 이제는 주인공들의 숨소리조차 외울 수 있을 듯 한 영화였지만, 비행기 안에서 본 원스는 이전과는 다르게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이 여행은 처음부터 혼자만의 기대와 환상으로 가득 찬 여행이었다.

그렇게 원스라는 영화를 좇아 찾아온 더블린에는 해질 무렵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내려앉고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흩뿌릴듯했다. 그러나 착 가라앉은 공기와는 달리 도시의 분위기는 묘하게 흥분되어 있었다. 공항에서 마주한 더블린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차분한 흥분을 갖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눈 앞에 보이는 더블린의 모습과, 혼자 머릿속으로 수 없이 상상했던 더블린의 모습을 계속해서 비교해보았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우산을 쓰기에도, 쓰지 않기에도 애매한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비를 그대로 맞으며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차창 너머로 보이는 사무실엔 불이 켜져 있었고 누군가가 책상 앞에서 분주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퇴사를 결심하기 전, 광화문에서 지내던 내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나는 누군가의 일상 속으로 들어온 이방인이었다. 내가 일상을 잠시 멈춘 그 순간에도 누군가는 평범한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사람들 무리 속에 섞여 25인치 캐리어를 끌고 가며, 나는 평범한 일상들의 저녁을 상상했다. 어쩌면 여행은 서로 다른 두 일상이 가장 직접적이고도 강렬하게 부딪히는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영화 '원스' 역시 서로 다른 두 일상이 마주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에 나오는 남자(글렌 한사드)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일상인 사람이다. 거리의 삶이 일상이라는 건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뻔한 문구를 온몸으로 느끼는 삶일 테다. 모든 이들이 목적지를 향해 분주하게 움직이며 스쳐가는 곳에서 묵묵하게 서서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삶. 만약 거리에 선 그를 카메라로 찍는다면, 그는 한 곳에 꼼짝 않고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미동조차 없는 또렷한 상(像)으로 찍힐 것이다. 다른 이들이 스쳐 지나는 바람 같은 궤적을 남기는 동안에 말이다.


영화 속 또 다른 주인공인 여자(마르게타 이글로바)는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잡지나 꽃을 팔아 가족들을 부양한다. 그녀는 남자와는 다르게 물건을 팔기 위해서 부지런히 두 발을 움직이며 거리를 활보해야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그저 거리를 스쳐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끊임없이 한 장소를 맴돈다. 거리 위에서 살아가는 삶은 그런 것이다. 타인을 무수히 스쳐 보내지만, 막상 본인은 계속 같은 장소에 머물러야 하는 존재.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마주하지만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고독해지는 삶.


영화의 시작에서 카메라는 그런 고독한 두 삶이 마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스쳐 보내던 둘은 길 위에서 서로를 마주하며, 단 하나의 생을 강렬하게 마주한다. 이 만남으로부터 펼쳐질 앞으로의 많은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이 장면은 결코 가볍지 않다. 영화는 서로 강렬하게 마주하는 두 개의 삶이 거리를 스쳐 지나가며 만나는 수천수만의 삶보다 의미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음악영화라고 하면 흔히 뮤지컬 영화를 떠올린다. 보통 이런 장르의 영화에선 주인공들이 길을 가던 사람들과 함께 현란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거나 갑자기 식탁 위로 뛰어올라가는 식의 비현실적인 연출을 수반한다. 이 같은 연출은 우리가 뮤지컬 영화를 일종의 판타지처럼 받아들이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이와는 반대로 원스에선 등장인물들이 노래 부르는 장면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이야기의 흐름 상 자연스럽게 노래를 불러야 하는 지점에서만 노래를 부른다. 이런 자연스러운 음악의 등장과 연출은 우리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을 현실에 있을 법한 캐릭터로 받아들이게 할 뿐만 아니라, 음악까지도 스토리 속에 등장하는 제3의 존재처럼 보이게 한다. 존 카니 감독은 어떤 지점에서 이야기와 음악이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완벽한 공식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작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출에도 불구하고 거리의 두 일상이 만나 함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이미 충분히 영화적으로 느껴진다. 처음 만난 남녀가 음악을 통해 감정을 나누는 정서적 교감은 실로 놀라워서, 비현실적이다 못해 동화같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같은 그 정서적 교류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음악이 가진 힘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막상 더블린이라는 도시에선 이런 이상적이고도 비현실적인 음악적 교감들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더블린을 여행하는 동안 도시에선 늘 음악이 울려 퍼졌다. 주인공이 노래를 부르던 그래프톤 스트리트뿐 아니라, 평범한 음식점에서도, 탁 트인 광장에서도 사람들은 늘 노래를 불렀다. 그것도 단순히 흥얼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악기를 꺼내어 들고 본격적으로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식이었다. 더블린 사람들은 자신들이 있는 공간이 어디든 그곳을 음악소리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런 음악이 주는 힘은 대단해서, 나 같은 낯선 이방인도 잔뜩 긴장했던 마음의 경계를 한층 느슨하게 풀고 더블린이라는 도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만들었다.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여행자에게 선물하는 음악들은 마치 원스라는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음악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더블린에서 음악은 그렇게 일상과 비일상을 묶어주고 있었다. 서로 다른 일상들이 만나는 지점에는 음악이 필요한 걸까, 싶은 생각과 함께 음악과 한 몸을 이루는 영화의 배경이 되기엔 더없이 적절한 도시라는 생각이 여행의 내내 들었다. 더블린 출신의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데에는 어쩌면 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노래가 좋다는 이유로 갑자기 다가와 말을 걸어온 여자와, 그런 그녀가 신기하기만 한 남자. 이 두 남녀가 서로를 알아나가는 과정은 서투르다 못해 잘못 빚은 밀가루 반죽처럼 맥없이 툭툭 끊어진다. 영화는 우리가 흔히 영화라는 장르에서 기대하곤 하는 드라마틱한 서사적 갈등 하나 없이 흘러가고,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영화라는 장르가 비현실적인 이유 중 하나는 논리정연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개연성을 지닌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조심스럽게 서로를 대하는 둘의 태도는 전혀 영화 속 주인공스럽지 않고 현실적이다. '현실적인 영화 속 주인공들'이라니. 그 조합은 '소설을 쓰는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만큼이나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들은 사랑을 말하는 순간조차도 섣불리 감정과잉에 빠지지 않은 채 적정선의 담백함을 유지한다. 그러나 서툴고 담백하기 그지없는 현실적인 둘의 모습 때문에 오히려 관객들은 영화에 더 쉽게 몰입한다. 우리는 보통 꾸미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에서 진정성이라는 감정을 느끼곤 한다. 영화가 비현실과 현실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성공적으로 해 나갈 때, 관객은 작품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조금 더 쉽게 공감한다.


이처럼 감정이 극도로 절제된 영화처럼 보이지만,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는 순간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전체적으로 일정한 감정선을 유지하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 같은 장면들이 더욱더 눈에 들어오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두 남녀가 함께 Falling Slowly를 부르는 장면이다.


남자는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여자가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웠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녀는 집에 피아노가 없어 지금은 연습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점심시간에 잠깐씩 들러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곳이 있다며 남자를 한 악기상점으로 데려간다. 어색하게 들어온 그곳에서 둘은 더듬거리며 기타와 피아노로 함께 호흡을 맞추며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둘은 음악을 통해 꾸밈없는 날것의 감정과 생각들을 표현한다. 주인공들은 오직 함께 음악을 할 때만 놀라우리만치 풍부하게 감정을 폭발시킨다.


Falling Slowly를 부르는 이 장면은 음악을 통한 교감이 지향해야 할 어떤 완벽한 이상향을 보여주고 있다. 난생처음 만난 남녀가 기타와 피아노로 호흡을 맞추고 하나하나 화음을 쌓아나가며 그려 나가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음악만큼 세상에 기적 같은 예술이 또 있을까 싶어 진다. 하나의 노래를 함께 부르며 감정과 생각을 공유해 나가는 그 지점은 이 영화의 가장 하이라이트가 되는 장면이자,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니까, 음악의 제1목적은 감정의 교감이며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일상들을 하나로 모으는 일종의 아교 역할을 한다는 그 사실.

존 카니 감독은 이 영화에서 자신이 살아온 더블린이라는 도시의 지극히 일상적인 장소와 거리들을 보여준다. 영화임에도 소설이 아니라 한편의 에세이 혹은 다큐멘터리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앞에서 말한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나 캐릭터들의 특징, 연출 등의 이유도 있지만 결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영화 속 촬영 장소들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속에서 둘이 함께 노래를 부르던 Waltons라는 더블린의 악기 상점 역시 영화가 아니었다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그저 평범한 가게에 불과했다. 더블린을 여행하는 동안에는 이렇게 숨어있는 영화 촬영지들을 발견해내는 재미들이 있었다. 마치 보물 찾기를 하듯 감독이 꽁꽁 숨겨 둔 보물을 찾는 기분이었달까. 사실 이 영화가 아니었으면 더블린에 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 나에게 이 도시에선 영화 속에 나온 장소들만이 의미 있는 장소였다.

둘이 Falling Slowly를 부르며 보여주듯이, 음악을 통한 교감은 그 어떤 정서적인 행위보다도 사람 사이의 유대감을 훨씬 더 깊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음악을 직접 부르거나 연주하며 감정을 공유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연인들이 하는 모든 행위 중에 서로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노래를 듣는 것이 가장 은밀하고도 감각적인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음악을 통한 소소한 정서적 교감인 셈이다. 때로 그 모습은 자못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하나의 노래를 나눠 듣는 동안, 둘은 오직 그들만의 세계에 속해 있다. 세상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오직 둘만의 세계. 그리고 둘 사이를 위태롭게 연결하고 있는 이어폰은 둘의 세상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다.


영화 속의 둘 역시 함께 같은 음악을 듣는다.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지는 않지만, 남자는 여자에게 본인이 작곡한 미완의 노래를 들려준다. 씨디플레이어에 씨디를 넣고 둘이 함께 여자의 집 계단에 앉아 노래를 듣는 모습은 소박하고도 아름답다. 이때, 남자는 곡을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에게 직접 작사를 해보겠느냐며 제안한다.

그렇게 남자가 돌아간 뒤에 여자는 씨디에 녹음된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붙인다. 한참 가사를 붙이며 노래를 듣던 그녀는 건전지가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 집 앞에 있는 가게로 나간다. 씨디플레이어에 새 건전지를 넣은 뒤 자신이 붙인 가사를 노래에 맞춰 흥얼거리며 거리를 걷는 그녀. 그리고 곧 몽환적이면서도 꿈결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이 마법 같은 장면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화면은 어둡고, 길가의 오렌지색 조명만이 간헐적으로 그녀를 비춘다. 평범한 거리를 걸으며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을 카메라는 그저 묵묵히 따라가며 담는다. 4분 남짓의 노래가 흐르는 동안 관객이 보는 것은 오직 그녀의 모습뿐이다. 흔한 거리의 오렌지색 가로등 빛에 둘러싸여 있을 뿐인데도, 꿈속의 장면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조용하게 읊조리는 듯한 마르게타 이글로바의 몽환적인 목소리는 자칫 밋밋할 수도 있었을 이 장면을 단숨에 마법같은 시퀀스로 바꿔버린다. 단언컨대 이 장면은 그 어떤 극적인 장치가 없음에도 원스라는 영화에서 관객이 가장 숨죽이고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나는 그녀가 집까지 걸어가며 부르던 'If you want me'를 들으며 천천히 영화 속 장소를 따라 걸었다. 거리는 조용했고,  이어폰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는 몽환적이었다. 인적이 드문 평범한 주택가였고,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굳이 올 일 조차 없었을 동네였다. 나는 그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영화 속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조금씩 함께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그와 그녀는 본격적으로 음반을 녹음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연주할 동료들을 구하고(그들 역시 거리의 음악가들이다), 녹음실을 대여하기 위한 돈을 빌리며 그렇게 차근차근 목표를 향해 다가가는 남자와 여자. 꿈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을 보는 일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경험이다.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거리의 두 삶은 그렇게 상대를 변화시키고, 조금씩 인생을 바꾸어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여자의 집 앞으로 와서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드라이브를 가자고 제안한다. 그 말을 듣고 고민하던 여자는 남자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드라이브를 나간다.

둘이 향한 곳은 더블린 근교의 킬라이니 힐이었다. 그곳에서 남자는 여자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현재 별거 중이며, 남편은 체코에 있다고 말한다. 그와는 잘 맞지 않지만 딸을 위해서는 남편과 함께 지내야 한다고 말하는 그녀. 여자의 얘기를 잠자코 듣던 남자는 체코어로 '그를 사랑해?'가 무엇인지 물어본다.


그리고 "Miluješ ho?(그를 사랑해?)"라며 어설픈 체코어로 물어보는 그의 질문에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며 답한다.

Miluju Tebe


처음 극장에서 이 문장을 들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스크린 속 자막에는 이 문장의 뜻이 나오지 않았고, 영화가 끝난 뒤에라야 나는 이 말의 뜻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그 뜻을 알자마자 나는 찌개 속의 뜨거운 두부를 무심결에 집어 먹은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렇게 엄청난 말을 그렇게 담백하게 풀어내는 영화라니. 나는 영화에 더욱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존 카니 감독의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 처럼 드러내지 않는 절제의 미학에 있었다.


사실 '원스'라는 영화를 내가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열여덟 살 겨울에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영화관에서 함께 본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에 두드러지는 갈등구조도, 기막힌 서사구조도 없이 밋밋하게 흘러가는 영화는 그 당시의 나로서는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핸드헬드로 찍힌 영상들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마치 영화라기보다는 실존하는 가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 뮤지컬 영화도 아닌데 음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생경한 영화. 그날 나는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 까지도 영화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상과 음악, 그리고 이야기가 적절한 지점에서 잘 버무려진 뮤직비디오 한 편을 보고 나온 듯 한 느낌이었다. 그 뒤로 영화를 같이 봤던 그녀에게 ost 앨범을 선물로 받고 나서, 나는 이 영화에 더욱더 헤어 나오지 못했다.


비록 영화를 함께 본 그녀와 잘 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날 이후로 나는 혼자서 이 영화를 수 십 번도 더 넘게 돌려 봤다. 한번 본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는 일이 거의 없는 내가 한 영화를 수 십 번도 더 넘게 본다는 것은 무척 예외적인 일이었다.

나와 함께 원스를 봤던 사람, 그러니까 내가 좋아했던 그 사람은 당시 내 담임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종종 함께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곤 했지만, 선생님이라는 사람에게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은 학생인 나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영화 속 여자의 대사에 훨씬 더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 사람을 향해 에둘러 감정을 표현하거나,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그 마음을 말하는 일 밖에 없다.


우연의 일치인지 더블린 여행을 떠난 그 해에, 나는 고등학교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그녀의 나이가 되어있었다.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 직접 그 영화의 장소를 돌아다니던 나는 복잡 미묘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나를 이 곳으로 여행시킨 건 결국 10년 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본 영화라는 이유로 완전히 한 영화에 매료되어버린 고등학생의 나였는지도 몰랐다. 만약 그 당시 이 영화를 그녀와 보지 않았다면 내가 여기까지 왔을까. 나는 영화 속에서 여자가 사랑을 말하던 그 언덕에 서서 '만약'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만약'을 떠올린다. 만약 그때 내가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술에 좀 덜 취했더라면, 만약 내가 좀 더 성숙한 사람이었더라면, 그래서 그 선택을 좀 더 다르게 할 수 있었더라면, 만약 이별을 말하던 마지막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만약에 만약, 만약.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은 무수히 많은 만약을 가정하며 환상을 만들어낸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어쩌면 이번 생에서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을 상황에 대한 처절한 후회에서 비롯한 것일 테다. 그리고 '만약에 그 순간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우리는 행복했을까'하는 상상은 영화보다 더한 판타지로 우리에게 남는다.


원스는 내가 영화를 본 뒤 결말에 대해 '만약'이라는 가정을 최초로 했던 영화였다. 당시 내게 주인공들이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 않는 멜로 영화는 원스가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그런 종류의 멜로 영화를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극장을 나서며 주인공들을 향해 수 없이 많은 만약을 가정했다. 그리고 그 가정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나를 향했다. 만약 내가 그때 좋아한다고 말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후회의 가정과 만일 돌이킨다 하더라도, 그 순간의 내 선택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는 씁쓸한 결론까지. 이럴 때, '만약'이라는 두 글자는 사람의 마음을 속절없이 무너뜨리기에 가장 효율적인 단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원스라는 영화에서 만약 여주인공이 '당신을 사랑해요'하고 직접적으로 말하며 여자가 남자를 따라 런던으로 갔거나, 남자가 여자와 함께 더블린에 남았다면 이 영화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었을까. 때로는 이루어지지 않을 때라야 비로소 아름답게 남는 관계도 있다는 걸,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배웠다.

그 뒤로 남자와 여자는 동료들과 함께 녹음실에서 몇 날 며칠을 보내며 성공적으로 녹음을 마친다. 그렇게 녹음된 음반을 들고 남자는 런던으로 향하고, 여자는 더블린에 남아 보통의 삶을 꾸려나간다. 떠나기 전, 남자는 그녀에게 작별인사로 피아노를 선물한다. 여자는 피아노를 보고 행복해하며 거실에서 가족, 이웃들과 도란도란 둘러앉아 피아노를 친다. 음악은 이제 그녀의 집에서 피어오르고, 영화는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은 둘의 관계를 보여주며 끝난다. 현실적이지만 소박하고, 그래서 따스한 결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는 영화라는 장르가 어떻게 판타지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더블린에서 원스의 촬영지를 찾아 여행하는 동안, 나는 둘이 처음 만났던 그래프톤 스트리트를 쉴 새 없이 지나쳤다. 그곳에서 나는 내 옆을 스쳐가는 수많은 행인들과, 내 앞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버스커들을 보며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거리에서는 수많은 일상들이 의미없이 부딪히고 있었다.


원스라는 영화의 촬영지가 아니었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리의 구석진 장소에는 나를 제외하곤 민망하리만치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만 혼자 어떤 마법의 장소를 본 것처럼, 그곳을 지날 때마다 늘 흥분에 가득 차 한참을 쳐다보곤 했다.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문득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던 그 구석진 공간이 둘의 만남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원스라는 영화의 촬영지였기에 내게는 그 거리의 어떤 공간보다 매력적인 장소일 수 있었듯이, 수 없이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 사이에서 서로를 발견해낼 때 우리는 비로소 각자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불현듯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원스라는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에서조차 주인공 두 남녀는 '그'와 '그녀'로 불린다. 그건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평범한 그, 혹은 그녀가 되어 일상을 살아간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비행기를 타러 뚜벅뚜벅 걸어가던 남자의 모습처럼 혹은 평범한 일상을 유지해 나가던 여자처럼 삶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 마법 같았던 둘의 짧은 만남은 앞으로 계속될 인생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아마 둘이 함께 음악을 하던 그 시간들은 둘의 기억 속에 흐릿한 장마철에 잠깐 비췄던 햇살 정도로 기억될 것이다.


감독이 러닝타임 내내 햇빛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던 이 영화의 마지막 엔딩에서 그토록 따뜻하고 찬란한 햇살을 보여준 건, 짧았지만 아름다웠던 둘의 만남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려는 감독의 메시지였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 그와 그녀의 만남은 대체로 흐렸지만 때때로 햇살이 비췄던 더블린의 날씨를 닮아있었다. 더블린과 어울리는 영화였고,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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