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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Mar 19. 2017

투명에 가까운 순수

Scene in the cinema - Sound of music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투명해지는 영화가 있다. 청명한 하늘과 푸른 숲을 배경으로 맑고 순수한 목소리가 가득 울려 퍼지고,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도 같이 상영되는 듯 한 착각에 빠지는 영화. 이 영화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순수를 닮아있다.


세상에 공개된 지 50년도 넘은 지금,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올라 꾸준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인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1965년작 <사운드 오브 뮤직> 이야기다. 영화의 배경이 된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와 카라얀이라는 세기의 음악가들과 함께, <사운드 오브 뮤직> 이라는 음악영화를 탄생시키며 세계에서 가장 음악적인 도시로 자리 잡았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천방지축 견습 수녀 마리아가 트랩가의 가정교사를 맡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영화의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밝고 경쾌한 전반부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후반부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뮤지컬, 그리고 실제 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서 주인공 마리아뿐 아니라 영화 전반에 걸쳐 모든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빈에서 기차를 타고 잘츠부르크에 도착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도시를 배경으로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알프스 산맥이었다. 앞을 보면 그저 평범한 유럽의 어느 도시와 다를 것 없었지만, 고개를 들어 시선을 조금만 멀리에 두면 험준한 알프스 산맥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 에 나오는 자연 풍경이 너무 비현실적이게 아름다워서 영화를 보는 내내 세트나 합성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의 풍경이었다.


영화는 이 아름다운 알프스의 초원을 뛰놀며 노래를 부르는 마리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마리아가 노래를 부르거나 초원에서 뛰놀기 위해 수녀원에서 말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자, 동료 수녀들은 그녀가 견습 수녀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 말을 가만히 듣던 원장 수녀님은 마리아를 조용히 불러 그녀에게 수도원을 잠시 떠날 것을 권유한다.

잠시 세상에 나가 원하는 게 뭔지 찾아보도록 해요. 자신에게 맞는 걸 말이에요.

마리아는 수녀원을 나오며 자신의 앞날에 대한 걱정과 기대에 가득 차 노래를 부른다. 이 영화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틈날 때마다 흘러나오는 노래들에 담긴 노랫말과 대사 때문일 테다. 거창한 오케스트라 연주도, 그럴듯한 수사도 들어있지 않은 음악과 노랫말들. 어쩌면 사람의 마음에 가장 가깝게 가 닿을 수 있는 표현은 꾸미지 않은 날것의 감정과 그것을 담아내는 담백하고도 순수한 언어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마리아가 지낸 것으로 나오는 수녀원은 호엔잘츠부르크 옆에 위치한 논베르크 수녀원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폰 트랩가가 나치의 눈을 피해 숨어 들어가는 곳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실제로 이 수녀원은 여전히 경찰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고 한다. 수녀원의 특성상 나 같은 여행객이 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을 들쑤시는 것은 실례일 듯하여 수녀원의 마당으로 보이는 곳만 살짝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수녀원을 나와 폰 트랩가의 가정교사로 일을 시작하게 된 마리아는, 폰 트랩 대령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군대식의 제식에 길들여져 군기가 바짝 든 아이들과, 얼음 같이 차가운 폰 트랩 대령. 이것이 그녀가 마주한 폰 트랩가의 첫인상이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가정교사가 자주 바뀌는 통에 가정교사에게 정을 붙이기는커녕 어떻게 골려먹을 수 있을지 궁리만 하는 말썽꾸러기들이었다. 그러나 마리아가 이런 아이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어느날 천둥번개를 무서워한 아이들이 마리아의 방으로 오자, 마리아는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마리아의 매력은 바로 이렇게 아이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소통에서 비롯한다.

폰 트랩가의 저택으로 나오는 레오폴츠크론 궁, 현재는 사유지이며 일부는 호텔로 사용중이라고 한다.
천둥이 왜 화났죠? 난 울뻔했어요.
난 기분이 나쁠 땐 좋은 일만 생각한단다.
어떤 거요?
좋은 것들이지!
수선화, 푸른 초원, 하늘의 별들,
장미 꽃잎의 빗방울과 아기 고양이의 수염,
주전자와 예쁜 장갑, 잘 포장된 소포 꾸러미들.

- My Favorite Things, Sound of Music OST

장미 꽃잎의 빗방울과 아기 고양이의 수염이라니, 한 편의 시에 가까운 노랫말을 듣고 있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어린 시절엔 어렴풋하게만 느꼈던 이 영화 속 노랫말과 언어의 아름다움이었다. 기분이 나쁠 때 좋은 것만 생각하라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것이 구체적이고 명료한 언어로 다가올 때 그제야 언어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이야기가 된다. 피상적이고 영혼없는 이야기가 아닌 구체적이고도 명료한 이야기, 언어가 주는 힘이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의 노랫말은 오히려 어린 시절이 아니라 조금 더 자란 지금에야 깊숙이 와 닿는다. 어쩌면 이 감동은 어린 시절엔 당연하게만 여겼던 것들을 더 이상 당연하게 여기지 못하게 된 때 묻은 어른의 자기반성적 감동일지도 모른다.


이 노래가 더 특별한 이유는, 후에 마리아가 혼란스러운 본인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들을 떠났을 때, 아이들이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이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에 그녀가 다시 등장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이 노래는 아이들과 마리아를 끈끈히 이어주는 연결고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노래 하나로 아이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마리아. 그녀는 폰 트랩 대령이 일 때문에 빈에 간 사이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며 잘츠부르크 시내를 돌아다닌다. 이건 그녀만의 교육 방식이자, 영화의 대사에 따르면 그건 아이들이 아버지에게서 배우지 못했던 '놀이'였다.

그들이 잘츠부르크 전역을 돌아다니며 부르는 노래가 바로 뮤지컬과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성공한 넘버 중의 하나일 도레미 송이다. 이 노래의 선율은 듣고 있으면 함께 흥얼거리게 되는 매력이 있다. 당연하게도 잘츠부르크를 여행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선 이 노래의 선율이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내를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마리아와 폰 트랩가의 아이들이 잘츠부르크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도레미송을 부르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을 떠올리면 고전이 가지는 따스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릴 적엔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장소들이 실제 하는 곳 이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도레미 송을 부르며 마리아와 아이들이 계단을 뛰어오르던 그 장소에 서서 나는 15년도 훨씬 전의 나를 떠올렸다. 잘츠부르크는 <사운드 오브 뮤직> 을 떠올리며 도시로 온 사람들을 과거로 보내고 있었다. 그곳에서 과거는 추억과 회한이 아닌, 현재로 다가와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잘츠부르크는 요새라는 이름에 걸맞게 웅장하고 빈틈없는 인상을 주던 호엔잘츠부르크를 제외하면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인상을 주는 도시였다. 그리고 도시 곳곳에 귀엽게 설치된 각종 픽토그램은 도시를 걸어 다니며 관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재미였다. 특히 신호등 불빛은 때론 커플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으로, 때론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이 서 있는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작지만 꽉 들어찬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잘츠부르크 시내에서 촬영한 몇몇 장면들을 제외하면 영화의 촬영지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침 잘츠부르크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 만으로 전 세계에서 여행객이 몰려드는 곳이었기에 현지의 투어상품이 잘 되어있는 편이었다. 나는 가장 유명한 영화 관련 상품으로 평가받는 한 업체의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를 이용했다. 투어의 내용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달랐으나, 렌터카가 없으면 갈 수 없는 지역도 투어를 이용하면 갈 수 있었기에 운전을 할 수 없고, 시간이 촉박했던 내게는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그렇게 투어를 시작하고 처음 들른 곳은 폰 트랩가의 저택으로 촬영된 또 다른 장소인 헬브룬 궁(Schloss Hellbrunn)이었다. 1616년 완공된 헬브룬 궁은 마르쿠스 지티쿠스 대주교의 여름 별장으로 쓰였는데, 현재는 일반에 개방되어 관광지로 쓰이고 있다.

헬브룬 궁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바로 가제보(Gazebo)라 불리는 이 유리 누각이다. 가제보는 우리나라로 치면 팔각정 같은 느낌의 단어다. 라틴어의 gaze(보다)와 ebo(미래형 접미사)의 합성어인 가제보는 서양에선 전망 좋은 곳에 설치해둔 정자 같은 역할을 하는 구조물인데, 요즘은 정원에 설치해두고 결혼식 등의 행사를 올릴 때 쓰이는 듯하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이 가제보는 랄프와 리즐이 "Sixteen going on seventeen"을 부르다 키스를 한 곳이자, 폰 트랩 대령과 마리아가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한 장소다. 그야말로 이 영화에서 나온 모든 장소들 중에 가장 로맨틱한 장소이자, 남녀가 사랑을 확인하던 가장 상징적인 장소였던 것.


특히 마리아와 폰 트랩 대령이 서로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던 장면은, 과하지 않고 부드럽게 연출해내 둘 사이를 흐르던 로맨틱한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밤의 은은한 불빛이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고, 그 안에서 실루엣만 겨우 보이는 남녀 둘이 서로의 마음을 애틋하고 수줍게 확인하는 모습은 오히려 흐릿했기에 더 또렷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둘의 표정은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은 채 형체만 겨우 보이던 그 장면은 그렇게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장면 중의 하나로 남았다.

투어상품이 지닌 특성상 헬브룬 궁에서는 이 유리 정원만 본 뒤 재빨리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만 했다. 헬브룬 궁을 좀 더 천천히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차를 타고 달리며 마주한 잘츠부르크 옆 장크트 길겐의 아름다운 풍경에 젖어들며 그 아쉬움은 금세 사라졌다.


투명하고 푸른 파랑. 그곳은 사람의 저절로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었다. 눈 내린 설원을 비추는 투명한 태양빛은 나까지 투명하게 만들었다. 눈 밭에 부딪히며 시리게 부서지는 태양빛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풍경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들숨에 섞여오는 차가운 겨울의 냄새는 차가웠고 그래서 더욱더 청량하게 느껴지던 곳이었다.

아름다운 장크트 길겐과 몬트제 호수를 넋 놓고 바라보며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몬트제 마을의 성 미하엘 성당이었다. 이곳은 바로 폰 트랩 대령과 마리아의 결혼식 장면이 촬영됐던 곳이다.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한 깔끔한 모습이 인상적인 성당이었으나, 이곳은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전면 보수를 한 성당이라고 했다. 유럽의 오래된 성당들 중 보존 상태가 이렇게 깔끔한 경우는 거의 처음이었다. 영화에서는 이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마리아와 폰 트랩 대령은 이 전에 봤던 논베르크 수녀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소박한 마을의 작은 성당임에도 내부는 영화에서 나왔던 그대로의 화려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촬영한 결혼식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매우 짧은 시간만을 보여줄 뿐이지만, 앞에서 봤던 가제보에서의 키스신 이후 바로 등장하는 장면이기에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뿐만 아니라 결혼식이 끝난 직후, 영화는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됐음을 보여주며 트랩가의 고난이 시작될 것임을 보여준다. 이 강렬한 분위기의 대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이 결혼식을 더욱더 인상 깊게 만들었다. 성당의 내부는 조용했고, 크기는 작았으나 그 때문에 화려한 오르골과 금으로 치장된 장식, 각종 그림들은 오히려 성당에서 더 돋보이게 빛나고 있었다.


견습 수녀였던 마리아가 한 남자의 신부가 되는 날, 그녀를 축복해주러 왔던 수녀원 수녀님들의 뿌듯한 표정을 떠올리며 성당을 구경했다. 그렇게 성당 내부를 기웃거리며 사진을 찍고 있는 내게 한 수녀님이 다가오더니 <사운드 오브 뮤직> 을 보았느냐고 물어왔다. 그녀에게 나는 이 날 하루 동안 찍었던 사진들을 보여주며 이 영화의 팬이라고 대답했다. 그런 나에게 수녀님은 즐거운 시간이길 바란다며 온화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 미소는 영화 속에서 마리아를 향해 띄우던 수녀님들의 미소와 포개져 보였다. 나 역시 수녀님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이며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성 미하엘 성당을 끝으로 잘츠부르크에서의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지 여행은 마무리됐다. 오직 <사운드 오브 뮤직> 의 촬영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루를 온전히 잘츠부르크라는 도시에 쏟은 것은, 나에게는 큰 모험인 동시에 행복이었다.


여행의 기간 동안 나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어느 순간을, Goldstar라는 상표가 붙은 검은색 브라운관 티브이 앞에서 도레미 송을 따라 부르던 작은 꼬마를 떠올렸다. <사운드 오브 뮤직> 의 촬영지를 찾아가는 일은, 결국 과거의 나를 찾으러 가는 여행이기도 했다. 나는 이 영화 촬영지들 속에서,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따뜻해질 수 있었다.

단순하고도 명료한 이야기가 주는 또렷한 메시지와 강한 힘. 그건 어쩌면 고전이라 불리는 영화들이 가진 제 1의 미덕일 것이다. 그리고 <사운드 오브 뮤직> 은 이 고전의 미덕을 가장 아름답고도 순수하게 간직하고 있는 영화다. 실제 폰 트랩 가의 아이들과 마리아의 끝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영화는 영화로 기억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잘츠부르크를 여행하는 내내 들었다. 그리고 아마 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노래를 부르며 추억을 쌓는 동안만큼은 그들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행복했던 순간들로 만들어진 영화의 발자취를 쫓아 여행한 한 여행자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빈으로 다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이 날 하루 동안 찍었던 사진들을 돌아보며, 다시 한번 도레미송을 흥얼거려보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투명해지는 영화이자,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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