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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30. 2015

오직 여행만을 생각하던 순간들

(2014.12.29, in London, UK)  - 1

전날의 일정이 아침부터 살짝 꼬이는 바람에, 잠들기 전 숙소에서 다음날 일정을 수정해야했다. 마침 버킹엄궁의 근위병 교대식이 있을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둘째날의 일정은 버킹엄 궁 근위병 교대식을 보는 것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여행을 하면서 좋았던 순간들 중의 하나는 이렇게 여행을 마무리 하고 숙소에서 느긋하게 맥주를 한캔 하면서 다음날 일정을 짜는 순간들이었다. 그 순간들에서 나는 오롯이 외부의 어떤 일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순수하게 여행을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런던을 본격적으로 여행하는 두 번째 날 아침. 첫 날 보다는 조금 늦은 시간에 눈이 떠졌다. 그래도 역시나 한국에서의 일반적인 기상 시간보다는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숙소에서 간단히 시리얼을 먹은 뒤 차분히 하루의 일정을 준비해 숙소에서 나왔다. 

런던에 있는 동안 묵었던 숙소의 모습

런던의 외곽에는 이런 모양의 집들이 많았다. 처음 숙소에 도착했을 땐 개인주택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여러 세대가 함께 주거하는 형태의 집이었다. 이런 집의 형태는 Flat이라고 불리는데, 하나의 건물에 둘 혹은 셋 정도의 가구가 함께 거주하는 형태이다. 물론 개개인의 주거공간은 분리되어 있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개인이 사는 집(혹은 방)의 문을 또 다시 열쇠로 열고 들어가는 형태로 되어있었지만, 아파트 보다는 조금 더 이웃과 소통하고 정을 나눌 수 있는 주거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웃집이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이만큼 피곤한 집도 없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버킹엄궁으로 가던 길에 가로지른 Green Park

숙소에서 나와서 런던 시내로 이동하면서 맞은 런던의 아침 날씨는 어제처럼 화창했다. 우중충한 잿빛 하늘로 악명높은 런던의 날씨를 생각해보면, 런던에 있는 동안 나는 참 지독히도 운이 좋았다. 런던에 대한 나의 인상은, 따사로운 겨울 햇살이 내리쬐던 크고 작은 공원들의 이미지로 기억되어있다.


버킹엄궁을 등지고 바라본 Green Park의 모습.

역에서 내려 버킹엄궁까지 가기 위해선 그린파크라는 큰 공원을 가로질러야 했다(근처에 있던 역 이름이 Greenpark Station이었다). 아침 햇살이 적당히 내리는 그린파크를 산책하듯 걸어가고 있으니, 이런 이른 아침시간에 한가로이 공원을 산책하고 있는 내 모습이 참 낯설게만 느껴졌다. 아침에 산책은 고사하고 일어나는 것 조차 버거워했는데, 이렇게 아침일찍 나와 가로수가 늘어선 공원을 산책하고 있으니 세상 그 누구보다도 성실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종종 여행은 사람을 성실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게 여행지에서의 늦잠은 사치이자 죄악이었다. 아침일찍 일어나 카페에서 커피한잔을 마시며(된장남 코스프레)여유를 부리는 한이 있더라도 늦잠을 자는 일 만큼은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11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숙소를 나오면 이미 하루의 절반이 날아가 있었다.(평소에도 이렇게 일찍 일어난다면 지금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여행지에서는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일단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던 버킹엄궁의 좌측 문

역에서 내려 버킹엄궁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누가봐도 '나 궁전 입구야'라고 써 놓은 듯한 화려한 문이 멀리서부터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이 날은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로 햇살이 강렬했다. 여름이었다면 무척 더웠을 날씨였다. 하지만 겨울의 태양은 뜨겁고 덥기보단 강렬하지만 따스한 느낌이었다. 예상했던대로 버킹엄궁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근위병 교대식을 보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버킹엄궁 앞을 지키고 있었다.

버킹엄 궁 앞에 이른 아침부터 몰려있던 많은 사람들

근위병 교대식이 시작하는 시간은 약 열한시 정도였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 나는 버킹엄 궁 앞에 가장 잘 보일법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근위병 교대식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으려니 여간 심심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내 주위로는 관광객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모인 관광객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이렇게 다양한 인종,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을 한 장소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사람들은 국적에 따라 풍기는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미국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쾌활하(시끄러웠)고 활기찼고, 일본인들은 상대적으로 수줍고 조용한 느낌이었으며, 유럽인들은(구분은 안되지만), 왠지 쿨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면 어떤 이미지로 비춰질까?하고 생각해봤다. 아마 혼자 사진기 들고 조용히(쭈구리처럼) 사진찍고 있는 정체모를 동양남자로 보였겠지.

버킹엄 궁전 앞에 있던 동상

그렇게 때 아닌 사람 구경을 하고 있을 즈음, 어디선가 "한국인 아니세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잘못 들었나?'싶을 때쯤, 내 옆에 있던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보였다. "어..네, 한국인 맞아요."하고 대답했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친구였는데, 취직에 성공하고 한 달 동안 유럽여행을 와 있다고 말했다. 그 순간, 오늘은 아마 이 사람과 동행을 하게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근위병 교대식을 보고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는데 같이 다녀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봤고, 나는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이때는 이 날의 이 만남이 미래에 어떻게 회자될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이 친구를 파리의 센느강에서, 이탈리아 로마의 포로 로마노에서 정말'우연히 길을 걷다가'만났다. (네가 여자였다면....)참 신기한 일이었다. 어떻게 생면부지의 남을, 그것도 머나먼 유럽땅에서 세 번씩이나 우연히 마주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여행에서 우연히 만나는 이런 만남들이, 모두 다 로맨틱한 것 만은 아니다.(농담)

버킹엄 궁전 앞 근위병 교대식 VIP석에 초대된 꼬마 신사 숙녀들

이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어느덧 근위병 교대식이 시작됐다. 이 날 근위병 교대식을 감상하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칼같은 열병식도, 흡사 어릴적 가지고 놀던 꼬마병정 장난감 같은 모습의 병사들도 아니었다. 그것은 웨스트 민스터 사원 이후로 다시 한번 느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였다. 말을 탄(!) 런던의 경찰들이 아이를 동반한 부모들을 근위병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안내해주고, 꼬마들이 그 앞에 쪼르르 앉아서 볼 수 있게끔 해주는 풍경은, 추운 겨울 한 시간 동안이나 서서 기다리던 여행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던 훈훈한 모습이었다.

버킹엄 궁전 앞에 빼곡히 모인 사람들

사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근위병 교대식 자체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우리가 흔하게 하는 실수 중의 하나가 있다면, 먼 타국의 행사나 축제에 가면 무언가 굉장히 특별한 것이 있을거라는 생각이다. 버킹엄 궁 교대식에선 수 백명의 근위병들이 근엄하게 일렬로 늘어서서 열병식을 하고 있으리라 상상했던 나였으니, 눈 앞에서 바라본 조금은 초라한(?)근위병 교대식에 실망할 수 밖에. 물론 이색적이고 색다르긴 했으나,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과 같은 성격의 행사다. 런던에서 봤던 근위병 교대식은, 서울을 오가며 봐 왔던 수문장 교대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날 느낀 실망 아닌 실망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뒤로 일부러라도 새로운 것을 보기 전에 큰 기대를 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이런 아이러니한 생각 덕분에 오히려 이후의 여행에서는 크게 실망하는 적이 없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우친 순간이었달까.

이 날의 추후 일정은 일단 버킹엄 궁의 근위병 교대식을 본 뒤에 결정할 생각이었기에, 근위병 교대식이 끝나니 나는 어쩐지 붕떠버린 느낌이 들었다.(여기서 다시 한번 내가 다른 사람들과 여행을 하기에 좋은 스타일이 아님이 드러난다. 아무 계획 없이 '일단 나가서 보고 생각하자'라니). 마침 이 친구도 일단 정해진 일정은 크게 없었기에 우리 둘은 일단 런던 시내에 있다는 다른 친구를 만나기로 결정하고 우리는 장소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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