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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27. 2015

그 모든 간극들에 대하여

Scene in the Cinema - Before Sunset 비포선셋

비포 선셋은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2004년도 작품이다. 이미 비포 선라이즈라는 희대의(?) 로맨틱 영화로 사람들에게 각인된 그는 9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비포 선셋이라는 속편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시리즈가 세상 사람들에게 유명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주인공 셀린느와 제시역을 맡은 배우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 그리고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까지 모두가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2013년에는 또 다시 9년의 시간을 두고 비포 미드나잇이라는 시리즈의 완결 편에 가까운 영화를 내놓는다. 물론 이번에도 남, 여 주인공과 감독까지 그대로인 채로 말이다.


개인적으로 비포 시리즈는 시리즈의 첫 편인 비포 선라이즈부터 미드나잇까지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대로 가져오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그 설정 자체가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비록 영화 자체의 내용이나, 스토리 자체는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지만(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둘의 대화가 거의 대부분인지라 지루하다면 지루할 수도 있는 영화다), 주인공들과 함께 시간 속을 걷고 함께 늙어가는 느낌을 주는 영화라는 점에서는 매력적인 영화임에는 틀림없었다.


비포 선셋은 이런 비포 시리즈 3부작(?)의 중간에 놓여있는 작품이다. 비포 선라이즈가 첫눈에 빠진 젊은 남녀의 운명과도 같은 사랑을 보여줬고, 비포 미드나잇이 예전 같은 로맨스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대신 켜켜이 쌓인 세월만큼 단단해진 커플(이제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비포 선셋은 시작하는 연인과 권태로운 연인의 중간지점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비엔나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두 사람이 재회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 제시가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출판한 책의 출판기념회를 위해 파리에 방문한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출판기념회를 위해 잠시 파리를 방문한 제시가 셀린느와 우연하게 다시 재회하고, 다시 한번 비엔나에서의 추억을 되새기며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하면 21일간의 짧은 유럽여행을 좀 더 재밌게 다녀올까 고민했던 나는 몇몇 영화 촬영지를 돌아다니는 컨셉을 잡았더랬다. 이 영화는 그 프로젝트(?)중의 하나였다.

비포선셋의 촬영지였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파리에 최초로 생겨난 영미문학 전문 서점이다.

파리에 여행하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셰익스피어 & 컴퍼니를 마주치게 된다. 파리의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 중의 하나인 노트르담이 근처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센느강변에 위치해있어 어디를 가든지 한 번쯤은 이 서점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사람들이 몰려있어 근처를 지난다면 호기심 때문에라도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이 서점은 파리에 최초로 생겨난 영미문학 전문 서점으로도 유명하다. 영화 덕분이 아니라 원래도 앙드레 지드나 헤밍웨이 등의 작가들이 즐겨 찾았던 역사 있는 서점이기도 한 이 곳에서 영화는 제시와 셀린느의 재회를 그린다. 둘의 재회를 나타내기에 이렇게 상징적인 곳이 또 있을까 싶다. 미국에서 온 제시와, 파리의 여인 셀린느. 온통 프랑스어로 가득한 파리 한 가운데 마치 영어의 섬처럼 위치한(파리의 한 가운데에 영국 최고의 작가 셰익스피어의 이름을 딴 서점이라니!) 이 이질적이면서도 운치 있는 영미문학 서점에서 둘의 재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미국 남자와 파리여자의 9년 만의 재회를 다루기엔 더 없이 적절한 장소처럼 보인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9년만에 재회한 제시와 셀린느.

실제로 이 서점은 단순히 비포선셋 혹은 미드나잇 인 파리의 촬영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도 무척이나 매력적인 곳이었다. 목조로 이루어진 서점 내부에 빼곡히 꽂혀있는 각종 서적들과, 조용히 책 읽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배려하는 서점 직원들까지 세 가지가 삼위일체 하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화로 인해 서점에 사람들이 몰려도 본연의 역할(?)을 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심지어 고맙기까지 한 곳이기도 했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옆 골목길. 그 둘은 이 곳을 돌아 걸으며 9년의 시간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저 멀리 파리의 상징물 중의 하나인 노트르담 성당이 보인다.

셰익스피어 & 컴퍼니에서 골목을 돌아나오니, 9년 만에 재회한 두 남녀가 걷던 길이 나왔다. 이 곳에서 셀린느는 제시에게 9년 전에 비엔나에 다시 갔느냐고 물어보며 그 당시 자기는 할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가지 못했다고 말한다. 셀린느 앞에서 얼버무리며 '나도 못 갔다'는 제시의 거짓말을 바로 알아차리곤 미안해하는 셀린느.

운명적인 사랑은 실제로 그 둘이  이루어졌을 때만이 '운명적'이라는 마법의 단어를 붙일 수 있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는 결코 '운명적'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다. 그들에게는 비엔나에서의 사랑이 그랬다. 비엔나에서의 사랑은 파리에서 재회하기 전 까지 '운명적'이라는 단어 대신'안타까운' 혹은 '아쉬운'이라는 접두사만이 붙을 수 있을 뿐이었다. 셀린느에게 할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가지 못한 9년 전의 비엔나도, 제시에게 셀린느를 만나지 못했던 9년 전의 비엔나도 둘에게 비엔나라는 공간은 그렇게 운명적일 수 있었던 사랑을 안타깝게 놓친 장소로 기억될 뿐이었다.

생 폴 생 루이 성당 근처의 골목길. 비포선셋에서는 이렇게 파리의 골목길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둘을 쫓아 세 번째로 간 곳은 서점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영화에서는 길을 '조금'걷는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 메트로를 타고 몇 분 정도 이동해야 나타나는 이 곳은 생 폴 생 루이(Paroisse Saint Paul-Saint Louis) 성당 근처의 골목길이었다. 이 골목길에서 둘은 제시의 소설과 둘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쓴 소설에 대해 셀린느는 자신이 타인의 눈을 통해 표현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렇게 묘사된 자신이 타인의 눈으로 읽히는 그 묘한 감정에 대해 털어놓는다. 우리는 종종 내가 생각한 내 모습과 타인이 생각하는 내 모습이 다를 때,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이질감을 경험하곤 한다. 셀린느가 그랬다. 제시가 묘사한 9년 전의 자신도, 그리고 사람들에게 읽히는 9년 전의 사진도, 자신이 생각한 9년 전의 소녀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셀린느는, 9년 전의 자신을 글로 써서 남겨준 제시에게 고마움을 느꼈을까.

생 폴 생 루이 성당의 골목길을 나오며

생 폴 생 루이 성당을 나오며 카페로 가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셀린느가 사는 곳으로 나왔던 파리의 한 아파트

성당에서 나와 그 길을 걷다 보니 근처에 셀린느의 집으로 나오던 아파트가 있었다. 영화에서는 마당에서 바비큐를 해먹는 같은 아파트 주민들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조용한 주택가일 뿐이었다. 왁자지껄한 바비큐 파티라든지, 명랑한 이웃 따위는 없었다. 아파트를 잠깐 구경한 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방해를 줄 것 같아 사진만 조금 찍고는 바로 나왔다.


둘이 대화를 나누던 Le Pure Cafe

둘은 카페에 들어가 9년 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본격적으로 나누기 시작한다. 그 둘이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이 신변잡기적인 내용들이었지만 생각해보면 9년 만에 만난 남녀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쉬지 않고 나눌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이 영화는 너무나도 로맨틱한 영화임에 틀림없었다. 매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커플 혹은 친구 간에도 서로 설전을 벌이게 되면 자연스레 감정이 상하곤 하는데, 이 둘은 의견 충돌과 대립, 그리고 작은 설전을 벌임에도 절대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운명의 짝은 마치 직소퍼즐과도 같다. 직소퍼즐은 두 퍼즐이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오히려 약간 혹은 전혀 다른 모양의 직소퍼즐이 둘, 그리고 몇 백개가 모일 때 하나의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이처럼 운명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남녀가 마치 직소퍼즐처럼 완벽하게 들어맞는 그 지점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것을 두고 우리는 마법이라고 부르는 것일 테다.

Le Pure Cafe의 내부 모습

이 둘은 카페를 나와 프롬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ée)의 산책로를 걸으며 9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하룻밤을 보냈던 9년 전의 제시와 셀린느는 이젠 더 이상 운명적인 사랑을 믿기엔 조심스러울 것이 너무나도 많은 나이로 파리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9년 전 비엔나에서 있었던 일을 놓고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상대를 보며 놀라워한다.

프롬나드 플랑테를 걷는 제시와 셀린느
둘은 서로가 기억하는 사건이 너무나도 다름에 놀라워한다.

서로 같은 사건을 놓고 다르게 기억하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있다. 보통 헤어진 연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비극은 바로 이런 '기억의 차이'에서 야기한다. 어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기억이 어느 누군가에겐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일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행복했던 일이 상대방에겐 아무 일도 아닐, 심지어 고통스러웠던 기억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보통의 경우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이고, 추억이다.


이렇듯 인간은 변하지 않는 사실 앞에서 무기력한 존재다. 우리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이 억지로 기억과 추억을 미화시키는 것은 어쩌면 과거의 기억에 대한 유통기한을 늘리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럴 때 우리는'기억은 미화된다'라는 유명한 경구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사실 비포 선셋의 촬영지를 쫓아다니는 과정은 영화만큼 로맨틱하지는 않았다. 영화 촬영지가 어딘지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기도 했고, 비포 선셋이라는 영화의 특징이 둘의 대화가 대부분인 영화인지라 촬영지 자체가 볼거리가 있다거나 한 곳들은 아니었다. 단지 '파리를 여행하는 여행자는 골목길에서 길을 잃어야  한다.'는 그 유명한 문장을 몸소 체득할 수 있던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제시와 셀린느의 로맨틱한 경험 역시 꾀죄죄하게 파리의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한국인에겐 파리와 서울 사이의 거리 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였다.


여행의 막바지에, 어쩌면 내가 경험한 그 간극들이 바로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결국 시간의 간극, 현실과 환상 사이의 간극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그 모든 간극에 대해 이처럼 로맨틱하게 풀어낸 영화가 또 있을까.

프롬나드 플랑테에서 바라본 해질녁의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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