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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Oct 01. 2018

김포행 편도 티켓

20개월의 제주생활이 끝났다

대한항공 KE1236편 김포행 비행기 안에서 노트북을 열어 글을 쓴다. 제주에 살기 시작하면서 익숙해진 비행기지만, 이번에는 다른때와는 달리 속이 울렁이고 뱃속을 누군가가 쥐어짜는듯한 기분이 든다. 멀미를 한다거나 귓 속을 아까부터 계속 웅웅거리며 울려대는 소음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평소와는 달리, 오늘 내가 탄 김포행 비행기는 왕복이 아니라 편도티켓이다.


20개월 가량의 제주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육지로 돌아간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경계라는 것은 수제비 반죽처럼 뚝 잘리어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에 아직까지는 제주를 완전히 떠난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살면서 겪은 모든 경계는 늘 저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 만큼이나 모호하고 불분명했다.


첫 직장생활에 지쳐 퇴사를 생각할 때만 하더라도 꼭 제주를 다음 행선지로 정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광화문은 좀 떠나고 싶었지만, 나는 제주도에 대해 어떤 감흥도 없는 사람이었다. 사실 어디든 상관없었다. 나는 철저하게 도시적인 사람이라서 서울에 계속 있어도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나는, 제주라서 내려왔다기 보다는 카일루아라는 팀이 제주에 있기 때문에 제주행을 택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내려온 제주였지만 이 곳에서의 생활은 내게 많은 것을 남겼다. 1년 8개월의 시간이란 짧으면서도 어딘가에 노스탤지아를 남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어서, 나는 마지막 한 주 동안 그 긴 시간의 기억들을 붙잡으려 한참동안이나 동네를 걸어다녔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일주일은 1년 8개월의 시간을 정리하기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제주에서 살면서 나는 입버릇처럼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 이만큼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이 또 있을까’하고 말하곤 했다. 집 앞 월평포구에서 세상의 끝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멍하니 듣던 일이나,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끔 보이던 반딧불이들.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던 카일루아의 건물과 그 건물 뒤로 보이던 한라산과, 작은 마당에 존재감을 과시하며 서 있던 야자나무. 밤마다 또렷하게 별자리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밝게 보이던 별과, 그렇게 밝은 별이 뜬 날이면 서귀포 시내에서 잔뜩 마시고도 집에 들어와서 더 마시던 술과, 서핑하는 팀원들을 따라가 그들이 타고 남은 파도가 해변에서 부서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일들(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닷가는 들어가지 않았다. 20개월 내내 나는 샤워할 때를 빼곤 발가락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았다)


그건 여유라는 모습의 일상이었다. 나는 제주에서 여행하듯 살았다기 보다는, 여유로운 일상을 살았다. 사실 제주라기 보단 카일루아에서 일했기에 가능한 삶이기도 했다.


그 모든 여유의 풍경을 나는 과연 잊을 수 있을까.


9월 한달 동안은 제주의 생활을 정리하는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SBS라디오 PD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던 PD라는 직업에 한 번도 도전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하나도 준비하지 않은 채 무작정 지원해버렸다. 덜컥 최종까지 가게 되었지만 결과는 탈락이었다. 비록 탈락했지만 느낀게 참 많은 과정이었다. 서류, 필기, 면접, 합숙면접, 임원면접이라는 잔인하고도 지난한 전형을 거치며 나는 내가 과연 PD를 정말 하고 싶어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그렇게 나는 언론사 시험을 또 지원할 것 같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형을 진행하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은 ‘PD가 되어 글을 쓸 수 없으면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10월 1일부로 백수가 되었다. 당장은 12월에 있을 미국 여행을 준비하며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 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어영부영 있다보니 서른은 벌써 세 달 밖에 남지 않았고, 올해 초에 책을 낸 작가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제대로 된 글을 쓰지 않은채로 한참이 지났다. 당분간은 글도 조금 열심히 쓸 예정이다. 물론 예정일 뿐이다. 지금 이 글도 쓰느라 한참을 애먹었다. 그렇지만 진행속도가 빨라진 왼쪽 눈의 녹내장이 더 심해지기 전에 최대한 많은걸 보고 기록하고 싶다.


창 밖으로는 희뿌연 안개에 둘러싸인 서울의 풍경이 보인다. 새파랗던 제주의 하늘과는 너무 달라서 오히려 내가 서울에 왔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준다. 제주에 살면서 이 비행기를 매달 적어도 한 번씩은 탈 수 있어 좋았다. 검은 개 세 마리가 격하게 반기고, 좋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월평로 31-2의 작은 집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사람은 마음의 고향을 남기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꽤나 진하게 고향을 남긴 듯 하다.


길고 긴 9월이었고, 20개월이었다.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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