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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Nov 20. 2018

무의미는 무의미일 뿐이다

2호선 전철을 타고 저녁 약속을 가는 중이었다. 홍대입구역과 신촌역 사이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데 문득, 사는 일이 너무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색 유리창에 희미하게 반사되는 내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인생의 무의미가 떠오르다니.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안티-드라마틱한 그 순간이 몹시 억울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대체로 한 사람의 인생에 치명적인 생각은 이렇게 난데없는 순간에 불청객처럼 찾아들곤 한다.


그날의 술자리는 가관이었다. 언제는 안 그랬냐만서도, 술자리 시작부터 늘어놨던 절주에 대한 의지는 술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져버렸다. 다음날 아침에 숙취와 함께 일어나 생각했다. 정말이지 인생을 왜 살아가는지 모르겠다고. 광란의 술자리가 있은 뒤의 허탈함과는 다른 종류의 기분이었다. 술 마신 다음날 후회하는 건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었으므로 적어도 이것 만큼은 장담할 수 있다.


인생의 무의미에 대한 의문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보편적인 고민일까? 적어도 나 혼자 이런 고민을 하는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란 원래 무슨 일에든 눈곱만큼이라도 의미를 찾는 존재들인데 하물며 인생의 의미를 찾지 않을 리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털어놓고 얘기하지 않는 걸까. 나는 살면서 주변 지인들에게 "사는 게 막막해 죽겠어.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거지? 나이가 들면 들 수록 더 모르겠어."등의 말을 들어 본 적이 거의 없다. SNS에서도 마찬가지다. SNS에는 내가 오늘 무얼 먹었는지 뭘 했는지 어딜 갔는지 기분이 얼마나 즐거운지 따위의 글은 올라오지만 인생의 막막함을 말하는 글을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상했다. 분명 내가 이런 얘기를 술자리에서 하면 다들 같은 고민을 하며 답은 모르지만 '그래도 살아야지 어쩌겠냐'며 술 한잔을 입에 털어 넣었던 것 같은데, 아무도 먼저 이런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자신이 약해 보일까 봐 그런 걸까? 부끄러워서?


사실 내가 이런 사유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정확히는 이 한문장에서 시작됐다.

"글을 쓰는 것 따위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2호선 전철에서 불현듯 떠오른 이 어마어마한 문장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누가 보면 대단한 작가인 줄 알겠다며 냉소 지을 이 문장의 파괴력은 무시무시했다. 나는 비단 글을 쓰는 것뿐 아니라 직장을 다니고, 학교를 가거나 밥을 먹고 사진을 찍으며 무언가 내 인생을 의미 있어 보이게 하려했던 그 모든 시도들을 거의 울고 싶은 심정이 되어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대전제 앞에서 그 모든 행위들은 궁극적으로는 쓸데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생각해보면 원래부터 소확행이니 뭐니 하는 말들은 애시당초 내 맘에 들질 않았다. 작은 데서 의미를 찾으라고 하는 사람들 치고 진짜 그런데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없는 법이다. 소소한 것들, 좋다. 나도 누구보다 그런 인생의 작은 지점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소소한 행복 따위나 좇으며 내 인생의 전체를 살고 싶진 않다. 하루키도 지금 한국사회에 통용되는 의미로 쓰일 줄 알았다면 책에 그렇게 쓰지 않았겠지.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걸까? 아니면 하는데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왜? 며칠을 혼자 생각하다 깨달았다. '아, 말해봤자 답이 없기 때문이구나.' 좀 허무하긴 하지만 결론은 이렇게 밖에 나질 않았다. 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는 도대체 답이 없었다. 그랬으니 니체니 사르트르니 쇼펜하우어니 등의 저 잘 나가는 철학자들도 본인 인생의 허무함과 무의미함 앞에서 계속해서 싸웠겠지. 그들은 생의 무의미함을 견디다 못해 허무주의나 실존주의 등의 사상을 남긴 사람들이니 나보다도 더 치열하게 고민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인생의 의미를 돈 권력 명예 행복 사랑 등의 수많은 것에 투영할 수는 있지만, 그런 것들이 주는 의미는 결코 평생 동안 지속되지 않는다. 내 경우에는 어떤 대상에 내 인생의 의미를 투영하면 할수록 공허함의 크기는 더 커져만 갔다. 왜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사실 뭐 원래 인생이 답이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고 심신이 편해졌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아니 실은 더 불편해졌다. 인생이 별 의미 없는 거라면, 언제 죽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나는 실존은 본질에 앞서므로, 인간은 그저 세상에 던져지듯 놓였다고 말하는 실존주의의 말을 꽤 좋아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속는 셈 치고 다시 한번 믿어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아주 거칠게 말하면 인생의 본질은 내가 사는 대로 정의되는 것이므로, 하루하루를 그저 내 방식대로 살다가 보면 그게 내 인생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하고 말이다. 사실 뭐, 의미 그딴 거 좀 없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 여전히 인생이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은 유효하다. 이런거 학부때나 좀 고민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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