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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Mar 10. 2019

적당한 거리감

나는 세계로부터 유기되었고, 슬프게도 남은 게 없다.

나는 늘 삶의 모든 것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했다. 사회 현안에 대해서도 적당히, 주변 사람들에게도 적당히, 사랑도 적당히. 모든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내 인생의 핵심은 오로지 거기에 있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그리하여 모든 것으로부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 책임을 진다는 건 타인의 인생이 깊숙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나는 타인의 인생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 인생도 타인에게 간섭받지 않기를 바랐다.


때로 그건 내 천성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늘 논쟁을 싫어했고 싸우는 것을 꺼려왔으며 갈등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좋은 게 좋은 것". 사람과 삶에 대한 내 태도는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리를 둔 다는 것이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서 초연함을 유지한다는 뜻일까? 그건 그저 비겁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하고.


나와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편리한 삶의 태도다. 무엇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어느 것 하나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니까.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그렇게 합리화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무언가로부터 거리를 둔 다는 것이 나 하나 편하자고 그저 모든 것에서 도피하는 삶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 문장의 뜻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쿨하게 구는 사람들에게 '쿨병'이라고 욕하면서도 내가 바로 '쿨병환자'처럼 굴고 있던 거였다.


무언가로부터 거리를 둔 채 바라본다는 건, 대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관심은 유지한 채로 멀리서 응원하는 마음이었다. 그리하여 적당한 때가 되었을 때, 대상에 대한 거리를 좁혀가는 것. 나처럼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책임지지 않으려 거리를 두는 것과는 애초부터 대상에 대한 따뜻함의 온도 자체가 달랐던 거다. 나는 그걸 모른 채 그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온 거였다.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지 않은 채로, 식어버린 홍차처럼 뜨뜻미지근하게. 매력 없는 사람으로.


그런 인생은 편리했다. 편한 게 아니라 정말로, 편리했다. 마음대로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취사선택할 수 있었다. 마치 물건처럼. 언제든 내 마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엇에도 마음을 주지 않고 마음을 닫아버린 높은 성탑의 죄인처럼 나를 가두었다. 나는 내 마음의 죄인이었다.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있던 거였다. 무엇에도 상처를 주지 않고 어느 것에게도 상처 받지 않는 죽어있는 인간처럼. 상처를 받지 않으려 애쓰니 사랑을 받을 수도 없었다. 나는 하루하루를 성실한 사형수처럼 지냈다. 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적당한 거리감. 그건 늘 나를 지켜주는 방패였다. 근데 지금은 그렇게 해서 내게 남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어쩌면 그 방패의 끝으로 나를 찌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세계로부터 유기되었고, 슬프게도 남은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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