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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Feb 14. 2019

호수에도 신기루는 핀다

2017 몽골 여행(06/18) - 1

몽골에서의 아침은 늘 분주했다. 나는 아침마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세면장으로 향했다. 언제 씻을지 알 수 없는 이곳에서 씻는 일은 모든 일에 선행했다. 그다음엔 아침을 먹고 짐을 쌌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이 아침마다 황급히 차를 타고 먼 거리를 이동했다. 유목 혹은 방랑 같은 여행에서 한 장소에 익숙해질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홉스골에서 맞는 아침은 지금까지 우리가 서둘러야만 했던 모든 아침들과는 달랐다. 우리는 이 곳에서 2박 3일을 머물 예정이었고, 따라서 하루만큼은 차를 타고 옮겨 다닐 필요가 없었다. 장소를 이동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는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몽골 여행이 시작된 뒤 가장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서둘러 떠나지 않아도 됐으므로, "얘들아 얼른 밥 먹어!"라고 소리 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했다. 느긋하게 씻었고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오전에는 보트를 탈 예정이었지만, 우리 모두가 준비를 다 마치고도 예약된 보트는 아직 오지 않았다. 너무 여유를 부리는 건 아닐까 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그대로 게르에 멍청하게 누워 보트가 오기만을 기다리기엔 아쉬워서 호숫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하늘은 더없이 맑았고, 바람은 가볍고 상쾌했다. 호수는 푸른 하늘의 색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었다. 저절로 "날씨 좋다"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하는 그런 날. 한국의 4월 즈음에 딱 하루만 만날 수 있는 그런 완벽한 날씨를 닮아있었다.

호숫가에서 한가로이 산책을 하고 있으니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보트가 도착했다. 우리는 보트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에 있다는 무인도로 갈 예정이었다. 호수 한가운데의 무인도라니. 마치 디카페인 커피 같은 이질적인 단어의 조합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보트를 타고 온 아저씨는 우리에게 파란색 구명조끼를 건넸다. 조끼에는 YAMAHA라고 쓰여있었다. 악기회사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구명조끼도 만들고 있는 줄은 몰랐다. 우리는 차례로 그 파란색 구명조끼를 착용했다. 보트는 사람들이 움직일 때마다 물 위에서 조금씩 출렁거렸다.


이윽고 웅-웅-거리는 굉음을 내며 보트가 호수를 미끄러져갔다. 파도가 없는 호수에서 보트는 거칠 것 없이 빠르게 내달렸고, 보트가 지나간 자리엔 요란한 자국이 남았다. 잠시 후에 돌아보니 우리가 떠나 온 호숫가는 이미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있었다. 보트는 중간중간 멈춰 서서 호수 한가운데에 가만히 떠있기도 했는데, 그때 바라본 호수의 색은 우리가 흔히 그림을 그릴 때 쓰는 파랑에다가 투명함을 한 스푼 정도 얹은 느낌이었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떠올랐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나이가 된 뒤로 색을 칠할때면 늘 물을 파란색으로 칠하고는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파란 물을 보자 그건 마치 물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 처럼 보였다. 믿기지 않아 보트 너머로 손을 뻗어 물에 손을 갖다 댔다. 투명하고 차가운 감촉이 손 끝으로 전해졌다. 그제야 물이라는 것을 실감했지만 호수는 여전히 낯설어 보였다.

보트를 타고 왕복 30분 정도가 걸리는 섬을 다녀오고 나니 또다시 할 일이 없어졌다. 우리 일행은 보트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떠난 강의 가장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시선을 저 멀리에 두었다가 낯선 풍경 하나를 발견했다. 신기루였다.


수평선의 끝에서 신기루가 희미하게 아른거리며 피어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볼까 말까 한 신기루를 이곳에선 사막에서도, 호수에서도 볼 수 있었다. 호수에서 신기루라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었다. 처음에는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게 신기루라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막에서나 보인다는 신기루가 호수에서도 보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문득 호수가 사막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과 극은 통하는 걸까. 잔잔한 호수의 광대함, 바람을 따라 그 위에 규칙적인 무늬를 그리며 어지러이 흔들리는 물결. 그건 얼마전에 본 사막의 모습과 흡사했다. 호수의 물은 마치 사막의 모래 같았다. 사막에서 모래가 마치 물 같다고 생각했던 내가 떠올랐다. 나는 사막에서 호수를 떠올렸고 호수에서 사막을 떠올렸다.


홉스골 호수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었다. 내게 그곳은 사막보다도 더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넓은 호수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보트 위에 있을 때, 나는 호수의 밑바닥이 얼마나 까마득한가를 상상했다. 얼핏 보기에 물은 부드럽고 온화한 듯 보이지만,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넘쳐도, 부족해도 문제인 물이라는 존재. 홍수가 나면 생명을 송두리째 쓸어버리고 가뭄이 들면 생명을 말라 죽이는 절대자. 그러나 모든 생명의 근원이기도 한 존재. 죽음 혹은 생과 가장 가까운 무언가. 물은 어쩌면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절대자의 모습과 닮아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수평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평평한 돌 하나를 주워 물수제비를 떴다. 수평선과 평행이 되게 최대한 몸을 꺾은 뒤, 돌멩이를 던졌다. 날아간 돌멩이는 잔잔한 호수의 수면을 경쾌하게 치며 달려 나갔다. 돌멩이가 일으킨 물결은 점점 흐려지면서 넓어졌다. 호숫가에는 물수제비를 뜨기에 제격인 돌멩이가 가득했다. 나는 하루 종일이라도 물수제비를 뜨며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동행들 역시 하나 둘 물수제비를 뜨기 시작했다.


"우와!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가르쳐줘!"

"물수제비... 몰라?"

"그거 완전 나 어릴 때 삼촌이랑 아빠가 하던 거 본 적 있어!"

"어... 그래..."


물수제비를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모두 수평선을 향해 돌멩이를 힘껏 던졌다. 이십 대 여섯 명이 쪼르르 서서 물수제비를 뜨는 모습을 2017년에 보게 될 줄이야. 그러다 갑자기 물수제비가 맘먹은 대로 되지 않던 동행 하나가 돌멩이를 한 움큼씩 집어 호수에 던지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돌멩이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호수에 떨어졌다. 후두두둑-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그건 흡사 소나기 소리 같았다.

다시 게르로 돌아온 우리는 점심을 먹고 또다시 시간을 흘려보냈다. 호숫가 근처를 산책하거나, 숙소 앞에서 공놀이를 하며 놀았다. 그마저도 싫증이 날 때면 평상 위에 누워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내리쬐는 햇살을 느꼈다. 날씨가 이렇게 좋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용서되는 날씨였다. 아니, 오히려 이런 날씨를 즐기지 못한 채 열심히 사는 것이 더 죄악일 것만 같은 날씨였다. 나는 누워서 '강아지나 고양이의 삶이란 이런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적어도 우리가 머물던 게르가 있는 곳에 나타난 송아지는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젠 눈 앞에 송아지가 나타나도 놀라지 않다니. 맙소사.

빈둥거리다 못해 평상과 한 몸이 되어갈 즈음,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승마체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욜링암 계곡에서 승마를 체험한 적이 있던 우리는 자신 있게 말 위에 올라탔다. 그러나 욜링암에서의 체험이 개론 수준이었다면 홉스골에서의 체험은 실전에 가까웠다. 우리가 말에 오르자마자 우리를 안내해주기로 했던 남자는 혼자 말을 타고선 신나게 저 멀리로 가버렸다.


"말을 타고 알아서 자유롭게 정해진 코스를 달린 뒤에 다시 돌아오세요"

"뭐라고...? 으아아악!!"

말을 타지 못해 놀림받았던 우리의 몽골인 가이드와(그렇다. 말을 타지 못하면 몽골인들은 놀림의 대상이 된다. 서울촌놈 뭐 그런 느낌일까) 우리는 전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당연할 것이, 우리는 말을 어떻게 달리게 하고 멈추게 하는지조차 모르는 생초보들이었다. 몽골인들의 승마 교육은 이런 방식인가 싶었다.


우리가 탄 말들은 미친듯한 속도로 달리거나 아예 움직일 생각을 하질 않았다. 내가 탄 말 역시 말을 안 듣기는 마찬가지였다. 얘는 자꾸만 풀을 뜯어먹으려고 고개를 숙이곤 했는데, 한 번은 멈춰 서서 동행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말이 풀을 먹으려고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게다가 한쪽에 멘 커다란 DSLR은 움직일때마다 덜컹거리며 갈비뼈를 찔러대 내 신경을 건드렸다. 덕분에 빠르게 달릴 땐 자연스레 말고삐를 한 손으로만 잡고 한 손으로는 카메라를 잡고 있어야만 했는데, 의도치 않게 영화에 나올 법한 카우보이 흉내를 내게 되었다. 물론 멋은 없었다. 입으로는 살려달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므로.


우리가 말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남자는 얄밉게도 혼자 온갖 멋진 척을 다 하며 말을 타고 초원 이곳저곳을 누볐다. 우리도 나중엔 익숙해져서 제법 속도를 내기도 하고 우리가 가고 싶은 곳으로 훌쩍 내달려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날을 생각하면 아찔해지곤 한다. 저 남자가 물수제비를 뜨면서 허세 부릴 때부터 알아봤어야했다.

그래도 이날 말을 타고 달렸던 기억은 오래도록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었다. 대지를 따라 격렬하게 달릴 때 귓가를 스치던 바람과, 말의 부드러운 등위에서 교감하며 하나가 된 내 몸의 움직임. 말은 신기하게도 내가 겁을 먹고 있으면 함께 불안해했다. 말과 나는 등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이때의 기억을 잊지 못해 몽골 여행을 끝낸 뒤에 제주에서도 승마체험을 해봤지만, 이곳에서 만큼 의 자유로움은 느낄 수 없었다. 말을 타고 광활한 대지를 누리는 몽골인들의 자유로움이 문득 부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남자가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 둔 것은 이런 기분들을 느낄 수 있도록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여전히 아찔했던 그날의 당황스러움은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말을 타고 돌아와 그런 생각을 했다. ’살면서 오늘 같은 하루를 보낼 일이 또 있을까’ 하고. 보트를 타고 호수를 건너고, 평상에 드러누워 내리쬐는 햇살 아래 가만히 누워있다가 말을 타고 초원을 누비는 일. 공을 갖고 노는 동생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까무룩 낮잠에 빠져드는 하루. 세상엔 내가 알지 못하는 종류의 평화로움이 얼마나 더 있을까 하고 헤아려보았다. 몽골은 늘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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