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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Feb 27. 2019

은하수와 세상의 끝

2017 몽골 여행(06/18) - 2

세상이 무지갯빛을 띄며 낮아졌다. 노을은 호수 위로 서서히 물들었다. 호수에는 변화하는 하늘의 색이 고스란히 담겼다. 하늘빛이 반사된 호수는 물보다는 차라리 수은 같은 금속성의 물질처럼 보였다.


늘 물가에 설 때면 세상의 끝을 상상하게 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세상의 가장자리일 것이라는 착각 혹은 기대감. 나는 늘 세상의 끝으로 가고 싶었다.


언젠가 왜 겨울바다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에 나는 겨울바다야말로 가장자리의 가장자리, 끝의 끝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바닷가든 호숫가든 시간과 정성을 쏟아가며 물가를 찾아온 목적이 행위가 아닌 장소인 사람들. 바다란 내게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이들이 길 없는 마음을 풀어놓기 위해 찾는 장소였다. 그런 마음을 어딘가에 던져두려면 저 너머의 세상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이 길게 펼쳐진 곳이 어울렸다. 내 마음을 물 위에 아무렇게나 유기해두어도 그곳에서 떠다니고 있을 먼저 온 이의 마음을 방해하지 않는 곳.


그런 바다라면 응당, 사람들의 환호와 열기로 가득한 여름바다보다는 인적이 드문 겨울바다가 더 어울릴 거라고, 그렇게 답했다. 귓가를 간질이는 물소리를 배경 삼아 갈 데 없는 마음을 수평선 저 너머에 풀어놓고 마음대로 떠다니게 하는 일. 세상의 가장자리에 서서 또 다른 가장자리를 생각하는 마음. 나는 늘 그런 사람과 그런 일들에 마음이 끌렸다. 노을이 호수를 오렌지와 자몽 그 사이의 색으로 물들이던 홉스골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가장자리를 생각했다.

노을이 내린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다시 게르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며칠간 그래 왔듯 작은 휴대용 가스버너에 가스를 넣고 불을 올려 음식을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짝지근한 불고기 냄새가 냄새가 게르를 가득 채웠다. 몽골 마트에서 발견하고는 너무 신기해서 덥석 집어왔던 청x원의 불고기 양념장으로 간을 한 불고기였다. 몽골 마트에서 청x원을 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오빠 빨리 저녁해 줘!"

"형 오늘 저녁 뭐야? 오 불고기다"

"오 불고기!"


요리를 하고 있으니 어느덧 동행들이 하나 둘 몰려와서 내가 요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마치 아기새들이 어미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듯이. 


위도가 높아지면서부터 공기는 몰라보게 차가워져 있었다. 저녁에는 얇은 패딩이나 플리스를 입지 않으면 쌀쌀할 정도의 날씨였다. 이렇게 적당히 추운 계절은 요리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없이 반갑다. 밥을 짓는 동안 타오르는 불의 따스함, 요리에서 올라오는 연기의 안온함과, 그 연기를 타고 코로 들어오는 음식 냄새가 주는 평온함까지. 이 모든 것을 제대로 느끼려면 계절은 여름보다는 겨울에 조금 더 가까워야 한다. 홉스골의 공기는 6월임에도 초겨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쌀쌀했다. 그건 요리가 저절로 하고싶어질 정도로 알맞은 좋은 온도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을 지어먹은 뒤, 우리는 한여름의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둥글게 모여 놀았다. 왁자지껄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시 혼자만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한 대 피우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은하수를 혹시나 오늘은 제대로 볼 수 있을까 해서였다. 우리의 여행 내내 밝은 달이 우리의 밤을 쫓아다녔고, 그 빛에 가려 별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사막도 좋고 호수도 좋지만, 몽골 여행의 정수는 뭐니 뭐니 해도 밤하늘에 물감처럼 흩뿌려진 별들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일일 텐데.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까만 밤하늘이 보였고, 그 위에 드문 드문 작고 하얀 점들이 보였다. 나는 눈이 어둠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밤하늘을 가만히 응시했다. 점점이 뿌려진 하얀 물감들이 점점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었던 나는 조용히 혼자만 삼각대를 들고 호숫가로 나갔다. 괜한 설레발로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완벽한 은하수와 밤하늘을 함께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호숫가는 낮과는 달리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 어둠은 내가 떠나온 제주의 바다와는 달라서, 오징어잡이 배나 등대가 내뿜는 불빛도 없었다.


대신 어둠의 수평선 위에 아득하게 별들이 펼쳐져 있었다.


굳이 카메라를 조작해 노출을 길게 주고, 삼각대에 올려둔 상태로 사진을 찍는 번거로운 과정도 필요 없었다. 은하수는 또렷하게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호수에 별빛이 반사되어 비칠 정도였다. 꾸며낸 말이 아니라 정말로 우주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인류라는 존재가, 지구라는 행성이 이 거대한 우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장엄한 순간이었다. 나는 게르로 달려가 동행들을 요란하게 불러왔다.


"얘들아 대박이야. 은하수 엄청 또렷하게 보여!!! 얼른 나와"

나는 한바탕 요란을 떨어 동행들을 불러 냈다. 우리는 다 같이 어두운 호숫가로 향했다. 땅과 물이 분간되지 않았고, 하늘과 호수는 오로지 별의 존재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손에 이끌려온 동행들은 짧은 외마디 탄식을 내질렀다. 이 광경을 달리 더 표현할 수 있는 감탄사가 존재할까 싶었다. 몇 번의 탄성을 날숨처럼 내지른 뒤에 우리는 조용해졌다.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여행의 피날레로는 더없이 완벽한 풍경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여행은 그래프의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한 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 진정한 몽골의 밤하늘은, 내게 세상 모든 것들을 언제나 세심히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몇 억년 전의 빛이든, 몇 만년 전의 빛이든 지구로 도달한 별빛은 모두 평등하게 2017년의 나에게 도착해있었다. 그들은 어두울수록 밝게 빛났고, 밤하늘은 오직 인내심 강한 관찰자에게만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계속 바라보아야 하는 것. 핵심은 거기에 있었다. 몽골에서는 모든 것들을 빈틈없는 눈빛으로 섬세하게 어루만질 때라야,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밤하늘의 별들도, 지평선 너머의 노을도, 나를 둘러싼 세상과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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