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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Jan 30. 2019

파도 없는 바다

2017 몽골 여행(06/17)

홉스골에 가까워지자 기온은 더 내려갔다. 6월 중순이라기보다는 10월 초에 더 가까운 날씨였다. 변하는 건 날씨만이 아니었다. 북쪽에 가까워질수록 나무들은 점점 더 많아졌고, 산은 점점 더 높아져갔다. 매일같이 차로 몇 백 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풍경은 날마다 달랐다. 먼 거리를 움직이는 일은 몽골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게 몇 시간씩 먼 거리를 이동하고 있으면 자연스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우리는 때로 막혀있는 생각에 도움을 받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풍경과 낯선 건물을 찾아 떠나지만, 정작 도움을 주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이동 중에 우리가 그저 무심히 흘려보낸 창 밖의 풍경이다. 멈춰있는 생각을 흐르게 하는 데에는 움직이는 이동수단 안에서 무심히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멈춰있던 생각이 자연스럽게 그 풍경을 따라 흘러가곤 한다. 게다가 흘러가는 풍경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런 방해 없이 생각이 흐름 속을 유영하기에는 더없이 탁월할 때가 많다. 


그렇게 무표정한 풍경의 흐름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의 방울들을 떠올리다 문득 내 마음에 들어오는 풍경을 발견하게 되면, 그때 여행자는 그 장면 속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흘러가기만 하던 생각은 구체적인 활기를 부여받게 된다. 이렇게 여행의 길 위에서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받으면 막혀있던 생각은 자연스레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몽골에서는 그렇게 몇 시간씩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을 움직였다. 몽골의 풍경은 늘 새로웠고, 때로는 멀리에서 느리게 때로는 가까이에서 빠른 속도로 늘 흘러갔다.

그렇게 생각의 흐름이 흐르고 흘러 엉뚱한 곳으로 갈 조짐이 보일 즈음이면,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난데없는 풍경이 끼어들어 생각에 브레이크를 걸곤 했다. 생각의 닻이 되어주던 새로운 풍경들은 늘 예고 없이 다가왔다. 자연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곳에서 갑자기 저 멀리에 마을이 나타나는가 하면, 어디에도 주인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양 떼가 한가로이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홉스골 또한 그런 식으로 등장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넓은 산과 황량한 벌판만 보일 뿐 도저히 바다만큼 넓다는 호수가 있을만한 곳으로는 보이지 않을때, 호수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몽골의 최북단, 러시아와 국경을 면하고 있는 홉스골호는 호수라기보단 차라리 바다처럼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아 수평선을 이루고 있는 호수는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그 거대한 호수를 처음 보고 느낀 낯선 감정을 나는 단순히 크기에 압도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꾸만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분명 호수는 살아있는데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를 않았다. 분명 이런 규모의 물 앞에 설 때마다 느꼈던 감각이 하나 빠져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비로소 깨달았다. 거대한 호수에는 파도가 치지 않았다. 밀물과 썰물, 조수간만과 해류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파도가 없으니 철썩-하는 소리도 없었고 그래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잔잔하고 조용해서 쓸쓸하게만 느껴진 것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물이라면 지금까지 바다밖에 본 일이 없었으니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낯설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다 같은 호수에는 파도가 없었다. 파도 없는 수평선이라니. 나는 계속해서 낯설었다. 호수 주변의 을씨년스러운 풍경들은 내가 느낀 쓸쓸한 평화로움에 한 점을 보태고 있었다. 나는 호수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보았다. 호수가 잔물결을 일으키며 강가의 자갈을 적셨지만, 파도는 치지 않았다. 바로 앞까지 가도 파도를 피해 도망가야 할 필요는 없었다. 비현실적으로 고요해서 한없이 평화롭게만 느껴졌다. 여행을 하다 보면 문득 '이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장소가 있는데, 홉스골도 그랬다. 예전에 할슈타트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일이 떠올랐다.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는 곳은 늘 고요하고 조용했다. 평화로움의 상징적인 장소처럼 보였다.

또 쓸데없이 이런저런 생각이나 하던 나를 깨운 것은 동행들이었다. 그들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머금은 채 호숫가의 나를 향해 걸어왔다. 커다란 호수를 보며 감탄사를 연신 내뱉는 그들을 보며 나도 그제야 "와"하며 감탄사를 내뱉어봤다.


"오빠 감탄사에 영혼을 좀 실어서 뱉어봐."

"나 진짜로 감탄해서 내뱉었는데...?"


라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동행 하나가 호숫가의 물을 장난스럽게 뿌렸다. 우리는 이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며 놀았다.


"호수 물 더러울 수도 있으니 적당히 놀아!"

"으... 또 아빠 같은 소리야."


나이 많은 티를 풀풀 풍기던 나는 물을 뿌려대는 동행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들을 구경했다. 여전히 나는 물이 싫었다. 인천이 고향이고 제주에서 2년 가까이를 살았지만 여전히 물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제주에서 2년을 사는 동안 바닷가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더 설명이 필요 없지 않을까. 뭐, 세상에는 물에 들어가는 것보다 물을 바라보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도 필요한 법 아니겠는가.


"적당히 놀고 이제 들어가자 해 지겠다. 저녁 준비해야지."

"네네 아빠~"


서른밖에 안됐는데 대학생 자녀들을 둔 아빠가 되어버렸다. 결혼도 안 했는데. 그렇게 한바탕 여유롭게 웃고 떠든 우리는 다시 게르로 돌아왔다.

뒤로는 우거진 숲이, 앞으로는 끝없는 호수가 펼쳐진 그곳이 우리가 이틀 밤을 보낼 장소였다. 몽골 여행을 시작한 뒤 한 장소에서 하루 이상을 머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속에 마치 세상의 중심인 듯 우뚝 세워진 게르에만 익숙해져 있던 내게 나무 아래, 우거진 숲 한가운데에 있는 게르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걸어서 2분만 나가면 물이 있는 곳이라니.


홉스골에 도착하기 전, 가이드는 우리에게 이 곳의 게르가 시설이 엄청 좋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바람을 넣어두었다.


"알고 있다니, 그게 무슨 애매한 말이야... 진짜 당구대도 있고 샤워시설도 잘 되어있고 그런 거 맞아?"

"음... 잘 모르지만 나도 얼핏 그렇게 들었어. 하여튼 좋대!"

"어... 어 그래..."


가이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친구는 가끔 이런 식으로 조금 어설펐다. 마치... 몽골어를 잘하는 동행인 하나를 더 붙인 느낌이었다. 하여튼 이렇게 그녀가 홉스골에서 묵게 될 숙소에 대해 잔뜩 바람을 불어넣는 통에 우리는 숙소에 잔뜩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었는데, 도착해보니 평범한 게르였다. 가이드 친구는 도대체 이곳에 당구대가 있다는 소리는 어디서 들었던 걸까.


차라리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면 나았을 텐데, 한껏 기대감이 높아져있던 것이 문제였다. 호수를 낀 파라다이스, 여행 막바지의 진정한 휴양! 이런 걸 꿈꿨던 동행들의 높은 기대감이 추락하는 소리가 내게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평소 여행에서 숙소에 무척 깐깐하게 구는 나는 의외로 몽골 여행 내내 숙소에 대해서는 늘 덤덤했다. 그건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몽골 여행을 시작한 뒤로 숙소에는 기대를 아예 접어둔 상태였기 때문에, 깔끔하고 샤워가 가능하고 벌레만 없다면 그걸로 족했다.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망할 바에 차라리 기대를 하지 말자는 식의 시니컬한 내 성향은 가끔 이럴 때 도움이 되곤 했다.

게르로 돌아온 나는 저녁을 준비하기 전 부랴부랴 클라이언트에게 보내야 하는 원고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몽골에서는 숙소인 게르에서도 인터넷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인터넷이 터질 때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 나는 한가운데에 있는 쉼터에서 떨어지는 해를 보며 노트북을 두드렸다. 원고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태평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억지로 있는 의지 없는 의지를 끌어와 원고를 수정하고 있으려니, 그 광경이 신기했는지 동행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작업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크게 바뀐 점은 남들 앞에 내 글을 보여주는 일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건 글을 잘 쓰고 못 쓰고의 차이라기보다는 부끄러움에 익숙해졌느냐 익숙해지지 못했느냐의 차이다. 여전히 글쓰기는 나에게 한참 부족한 능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남들에게 글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는 일 자체에는 전 보다 거부감이 훨씬 덜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지인들에게 보여주는 글은 민망하고 낯설기만 하다. 글 속의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 있는 간극 때문이다. 아무리 글을 쓰는 사람이더라도 매번 자신의 글처럼 행동하고 말하고 표현하지는 않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동행들에게 처음으로 글을 보여줬다. 이런저런 피드백을 받고 막히는 부분에 대한 의견을 구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뭐랄까, 이 사람이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하고 의아해했던 동행들이 그나마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된 것 같았다.


나무들 사이로 제 몫을 다한 햇살이 평화로이 내려쬐고 있었다. 해는 몰라보게 짧아져 있었다. 파도 없는 바다에서의 고요한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p.s 최근 눈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은 지희의 쾌유를 빌며. 눈도 얼른 낫고 남미 여행도 잘 무사히 다녀와서 꼭 여행얘기를 들려주렴.


https://www.instagram.com/jw_yoon_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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