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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Oct 20. 2015

때로는 흐리게 기억될 필요가 있다

(2014.12.29, in London, UK)  - 2

스스로가 그날의 날씨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중충한 날씨 보다 햇살이 적당히 내리쬐는 날에 기분까지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평소보다 구름의 움직임과 습도, 바람의 세기까지 모든 기후의 변화에 기상청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여행지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내가 비 오는 날씨를 좋아한다지만, 비 오는 날이 여행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에서의 시간들은 내게는 어찌 보면 큰 축복이었다. 작정한 듯 우중충하고 흐린 날씨만 보여주기로 악명 높은 런던에서 좋은 날씨 덕에 내 기분까지 덩달아 좋아지는 경험을 한 여행자는 내 주변을 돌아봐도 몇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우중충한 날씨에 잔뜩 기분만 가라앉고 우울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여행 동안 이렇게 날씨가 며칠씩 연달아서 좋았던 때는 오직 런던에 있을  때뿐이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 날씨 좋다는 이탈리아에서조차 나는 우중충한 잿빛 하늘을 자주 보곤 했다. 유럽의 날씨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만큼이나 변덕스러웠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 나들이 나온 사람들

버킹엄궁을 뒤로 한 채 런던 중심가로 향하던 길에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가 있었다. 따뜻한 겨울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려는 듯, 공원에는 꽤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있었다. 유럽에선 사람들이 해만 뜨면 다들 달려나와 일광욕을 한다던 말이 생각났다. 겨울만 아니었으면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리라.

햇살 가득한 런던의 거리를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덧 런던의 상징인 빅벤이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낮에 본 빅벤의 모습은 밤의 모습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빅벤과 빨간2층버스, 블랙캡

사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이 날의 일들에 대해서는 크게 쓸 이야기들이 없다. 아무리 되짚어봐도 신기한 인연이었던 한 친구와의 동행이, 내게는 유럽여행에서의 첫 동행이었다는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와 더불어 21일간의 유럽여행을 통틀어 가장 날씨가 좋았던 날이었다는 기억도 함께 말이다.

빅벤과 빨간색의 2층 버스, 그리고 말을 탄 경찰

여행을 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매 순간 순간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순간은 핀이 나간 사진처럼 흐릿하게 기억되기도 하고, 어떤 순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기억 속에 아주 또렷하게 남아있기도 하다. 그건 기본적으로 기억과 추억이라는 존재가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기억하고 싶다고 기억할 수 있고, 지우고 싶다고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런 의미에서 날씨도 좋고, 동행이 있어 외롭지도 않고, 모든 요소들이 완벽했음에도 그 장면들이 명징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그 순간과 장면들이 내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 못했다는 것 아닐까. 그리고 여행 중에 의외의 장면들이 기억된다는 건, 그 장면들이 정말 내 마음에 파동을 일으킨 마음의 장면들이라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빅벤 앞에서 이 친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뒤 우리는 약속 장소인 트라팔가 광장을 향했다. 트라팔가 광장은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을 기념하여 만든 곳으로, 영국의 대표적인 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의 입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날씨도 좋겠다, 트라팔가 광장까지 템즈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그 길은 건너편에 영국의 또 다른 상징물인 런던아이가 위치해있어, 런던 내에서 런던아이를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템즈 강변을 지나며 본 런던아이

한참을 신나게 사진을 찍다 뒤늦게 같이 동행했던 친구를 의식하고 뒤를 돌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며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민망해진 나는 얼른 이동하자고 말했고, 그 친구와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여행을 다니거나 어떤 장소를 누군가와 같이 갔을 때, 그 사람은 동행을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렇게 자꾸 말하면 어쩐지 사회 부적응자 같은 느낌이 드는데, 사진을 찍는 일은 내게는 꽤나 집중을 요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이 간 사람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한참을 혼자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으면 같이 간 사람을 본의 아니게 버려두게 되는 것이다. 뒤늦게 소위 말하는 '인생샷'몇 장을 찍어주면 그제야 상대방의 기분이 좀 풀리긴 하지만, 그래도 미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동행이 있으면 아예 사진을 적게 찍거나, 사진을 찍기 위해 혼자 다니는 일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내셔널 갤러리와 트라팔가 광장

템즈강을 따라 쭉 걷다가 시내 쪽으로 꺾어 들어오니 저 멀리 트라팔가 광장과 내셔널 갤러리가 보였다. 여기서 나는 함께 동행했던 친구의 또 다른 친구를 만났다. 둘은 뮤지컬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 피카딜리 서커스를 잠시 들를 예정이었고, 나 역시 일단 점심을 먹고 내셔널 갤러리를 구경할 생각이었기에 우리는 함께 피카딜리 서커스로 향했다.


피카딜리 서커스에서 그 둘이 뮤지컬 티켓을 사기 위해 둘러보는 과정을 같이 다니며 나 역시 적당한 티켓이 있으면 구매할 생각이었는데,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은 초짜 셋이 피카딜리 서커스의 수 많은 티켓 부스에서 적당한 가격의 티켓을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결국 수 많은 티켓부스를 기웃기웃 거리기만 했을 뿐, 적당한 티켓을 구하지 못한 채 점심으로 간단히 길에서 파는 조각피자를 먹고 내셔널 갤러리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내셔널 갤러리 앞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다양한 거리공연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이런 광경은 우리나라였다면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박물관 혹은 미술관 앞을 가더라도 깔끔하고 정숙한 분위기에 관람객이 압도당할 뿐 이렇게 시끌벅적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웃고 떠드는 광경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런던뿐 아니라 유럽의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사람들이 모일 만한 널찍한 광장이 있는 곳이면 그 장소가 어디가 됐든 이렇게 거리공연이 펼쳐지곤 했다. 그리고 그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들을 구경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는데, 이런 모습들이 바로 유럽의 광장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인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던 우리는 내셔널 갤러리로 들어갔다.

내셔널 갤러리의 입구

내셔널 갤러리는 그 입구부터 웅장한 모습을 자랑했는데, 또 하나 놀란 점은 입장료가 무료라는 사실이었다. 관람객은 자신이 내고 싶은 만큼만 돈을 지불하면 되는 형식이었는데, 이는 영국이 대영제국 시절 약탈했던 수 많은 유물과 미술품들에 대한 각 국의 사람들에 대한 사죄 혹은 배려의 의미라고 들었다. 우리는 뻔뻔스럽게도(?)한 푼도 내지 않은 채 들어갔는데, 들어가고 나서야 이런 거대한 규모의 미술관에 돈을 내지 않고 들어오는 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를 실감했다.

내셔널 갤러리 내부의 수 많은 사람들

내셔널 갤러리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미술품을 보기 위해 줄 서 있었는데, 여기서부터 우리는 각자 흩어져서 미술품들을 감상했다. 나는 미술품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들과 결국 동떨어져 혼자 구경하게 됐는데, 지금도 유럽에서의 첫 미술관이 내셔널 갤러리였다는 사실에 감사하곤 한다(물론 제일 좋아하는 미술관은 프랑스의 오랑주리와 오르세 미술관이지만).


지금은 그래도 미술작품들에 작게나마 흥미를 갖게 됐지만 유럽여행을 시작했을 당시 나는 미술작품을 감상하러 직접 미술관에 간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때문에 나는 내셔널 갤러리를 들어갈 때 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여행을 다녀온 지인들의 간증에 가까운 말들을 믿지 않았다.("유럽에서 직접 본 고흐의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 앞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서 있었던 그 순간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등)

하지만 지금은 나도 유럽에서 다녀온 미술관들에 대한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유럽여행을 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술관을 실제로 다닌 적은 없어도 사진전은 즐겨 찾는 편이었는데, 그때도 나는 사진 역시 컴퓨터 모니터로 보는 것과 사진전에 가서 직접 인화된 사진을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음을 종종 느끼곤 했다. 하물며 회화의 경우, 물감의 종류와 화풍의 차이 등 더 세세한 기법들이 총 망라되는 예술작품이다. 1과 0의 데이터로만 구성된 컴퓨터 화면 속의 미술작품과 실제 작품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왜 이 전까지는 몰랐는지, 스스로 생각해봐도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내게 이렇게 잊지 못할 첫 경험(?)을 안겨준 내셔널 갤러리에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작품은 William Etty라는 작가의 Rachel Félix라는 그림이다.

레이첼 펠릭스 @ 내셔널갤러리

거의 모든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면서 사진을 찍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몇몇 작품들은 그 순간의 분위기와 기분을 계속 간직하고 싶은 욕심에 사진으로 기록해두곤 했다. 이 작품 역시 그런 작품 중의 하나였는데, 처음에는 미술작품에 물이 묻은 줄 알고 놀랐을 정도로 여인의 눈에 맺힌 눈물의 묘사가 정교했다. 이 그림은 Rachel Félix라는 1800년대 프랑스의 유명한 여배우를 그린 작품이다. 그녀는 어딘가를 슬프게 응시하고 있지만 오열하지 않고 절제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눈에 살짝 눈물이 고일 정도로만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녀가 응시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떠나가는 연인이었을까, 혹은 눈물짓게 만드는 그녀 기억 속의 아련한 풍경이었을까. 이 그림은 내게 이런저런 상상력을 잔뜩 안겨주는 작품이었다.


결국 나는 이 그림 앞에서 순간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아 한참을 떠나지 못했다. 사실 이보다 더 정교한 그림들은 훨씬 많다. 내가 끌렸던 점은 단순히 눈물과 그녀의 표정에 대한 정교한 묘사가 아니라 그 순간 그림과 나 사이에 흐르던 묘한 분위기, 무언가 그녀가 내게 말을 건네는 듯한 그 순간의 느낌이었다. 그림을 왜 두 눈으로 직접 봐야 하는지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모네의 수련 @ 내셔널갤러리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작품은 유럽여행을 다녀온 뒤 내가 가장 사랑하게 된 작가 모네의 수련이었다. 모네는 여러 폭의 수련 작품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데, 내셔널 갤러리에도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은 모네의 수련 연작이 벽면에 걸려있는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할 작품이었는데 어떤 사정으로 인해 오랑주리 미술관에는 걸리지 않았다고 벽면의 설명에 적혀있었다(어떤 이유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셔널 갤러리 관람을 끝내고 마주한 트라팔가 광장의 밤

한참 동안 정신없이 그림을 구경하고 나오니 벌써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세 시간이 훌쩍 넘어가 있었다. 또 한번 내셔널 갤러리의 규모에 놀랄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한 작품 한 작품 자세히 보지도 않고 모든 전시실을 보겠다는 일념하에 빠르게 돌아다니려 노력했는데도 세 시간이 넘게 걸렸으니, 아마 내셔널 갤러리를 제대로 보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리리라.

내셔널 갤러리의 밤

어둠이 내려앉은 내셔널 갤러리와 그 앞의 트라팔가 광장은 낮에 본 모습과는 달리 조금은 차분한 모습이었다. 바로 옆에 채링크로스역이 있었지만 기왕 밤도 됐겠다, 인터넷에서 봤던 템즈강 야경 스팟을 찾아가 보기로 결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전 세게 어디에나 있는 맥도널드에서 가볍게 햄버거 하나를 사서 가방에 넣은 채 골든 쥬빌리 브릿지로 향했다.

골들 쥬빌리 브릿지로 가면서

골든 쥬빌리 브릿지는 템즈강변에 있는 다리 중에 런던아이와 빅벤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라고 한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있었기에 주저 없이 다리로 향했는데, 겨울 강바람이 생각보다 꽤 쌀쌀했다. 야경을 바라보며 청승맞게 맥도널드에서 산 햄버거를 먹고 있으려니 괜스레 기분이 울적해졌다. 런던까지 와서 런던아이와 빅벤이 있는 템즈강의 야경을 보는데, 겨울 강바람을 맞으며 햄버거나 먹고 있다니. 이럴때면 가끔은 여행지에서 좋은 음식을 먹어주고, 좋은 사람과 함께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솔직히 체할 것 같고 우울해서 다리 위에서 금방 내려왔다. 이 다리 위에선 나를 제외한 남녀노소 전부가 커플이었다.)

골든 쥬빌리 브릿지에서 청승떨며 바라본 템즈강의 야경

다리에서 내려온 뒤 숙소로 가기 위해 이제는 신도림역 만큼이나 익숙해진 워털루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다음날 탑승하기로 되어있는 런던아이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자 런던아이 앞을 지나갔는데, 런던아이의 크기가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

밑에서 바라다 본 런던아이의 모습

아래서 바라다보면 대충 이런 느낌이었는데, 멀리서만 봐서 그랬는지 가까이서 본 런던아이의 모습은 '걸리버를 바라보는 소인국 사람들의 기분이 이런걸까'싶게 만들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날의 여정은 내셔널 갤러리 외에는 이렇다 할 뚜렷한 일정이 없었다. 생각보다 별로였거나, 기억에 남는 일이 없다거나, 즉흥적인 일정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이 날의 일정은 내셔널 갤러리를 전후로 인상 깊은 기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로지 내셔널 갤러리를 가기 위해 이 날의 일정을 소화해낸 느낌이랄까.


사진을 찍다 보면 때로는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이 좋을 때가 있다.
정확하게 맞지 않은 초점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기도 하고,
오히려 사진의 분위기를 살려주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기억의 초점도 때로는 흐릿하게 맞춰줄 필요가 있다.
기억의 초점을 흐릿하게 맞춰주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기억은 미화된다.'는 경구일 테다.
그리고 이 경구는 여행을 추억할 때 가장 절실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렇게, 유럽 여행에서의 3일 차가 지나가고 있었다(아직도 3일 밖에 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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