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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Nov 01. 2015

장소들에 대한 오해

(2014.12.30, in London, UK)  - 1

영국은 국가의 정체성이 무척 뚜렷한 나라 중의 하나다. 정치체제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이며, 국민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여준다. 그 뿐 아니라 음악과 문학과 같은 분야에서도 다양한 예술가들이 영국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려왔다. 이런 영향력은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건재한데,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큰 흥행을 불러일으킨 킹스맨과 같은 경우는 '영국'하면 우리가 떠올리는 신사, 젠틀맨의 감성이 잘 녹아있었던 작품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 영국에 열광하는 두 가지가 있다면 바로 '비틀즈'와 '셜록홈즈'다. '비틀즈'는 두말할 필요 없이 20세기를 대표하는 밴드로써,  록음악뿐 아니라 대중음악의 역사가 비틀즈 이전과 비틀즈 이후로 나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음악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셜록홈즈 역시 추리소설 하면 사람들이 흔하게 떠올리는 작품이 되었고, 덕분에 셜록홈즈는 전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탐정 캐릭터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원작 셜록홈즈는 각종 드라마, 영화 등으로도 각색되어 나오기도 했다.


런던에서의 여행을  시작한 지 세 번째날, 나는 이렇듯 영국을 대표하는 두 문화 아이콘의 정취가 녹아있는 장소를 찾아 가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비틀즈가 해체하기 전 마지막 녹음을 한 곳으로도 유명한 Abbey Road는 런던 도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달려 도착했음에도 역에서 Abbey Road 스튜디오까지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했다. 걸어가면서 나는 mp3 플레이어에 넣어두었던 비틀즈의 마지막 녹음물들이 들어있는 앨범"Abbey Road"를 들었다.


비틀즈의 Abbey Road앨범은 그들이 해체하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녹음한 노래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기상으로 발매는 Let it be앨범이 더 늦게 발매되었지만, 그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녹음한 곡들은 Abbey Road에 들어있는 노래들이었기에 그들의 마지막 앨범을 이 앨범으로 보기도 한다.

런던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동네는 내가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지냈던 리치몬드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시골 동네의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까지는 아니었지만, 내가 바라보던 런던 도심의 화려한 모습이 아닌 아늑하고 평화로운 도시 외곽의 모습이었다. 이른 겨울 아침, 마치 눈이 내린 듯 성에가 잔뜩 낀 도로와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그 곳에서 나는 진짜 런던의 모습은 사실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하는 흔한 오해 중의 하나가 대도시의 모습, 관광지의 풍경을 실제 그들의 생활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행하며 마주치는 모습들은 그들의 실제 생활과는 1% 정도의 연관성밖에 없다. 우리나라처럼 작은 땅덩어리에서도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면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양식들을 볼 수 있듯이, 외국의 어느 여행지를 가더라도 그들의 생활모습이 모두 런던, 파리, 로마와 같은 대도시의 모습이 전부는 아니라는 소리다. 그래서 나는 런던 같은 대도시의 중심부도 좋지만, 중심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진 장소에 들러보는 것을 추천하곤 한다. 이렇게 조금만 런던 도심에서 벗어나도 사뭇 다른 풍경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간 곳도 런던 시내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듣기만 해도 흥분되는 그 이름 Abbey Road. 비틀즈의 전설이 시작된 리버풀을 갔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이 곳 역시 내 가슴을 뛰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이 곳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비틀즈의 마지막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보고자 기웃거리고 있었다. 비틀즈의 마지막이 담긴 곳이라기엔 내 예상보다 평화롭고, 무척이나 조용한 곳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이 곳도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 시끌벅적하게 비틀즈를 추억하는 일은 이 곳이 삶의 공간인 사람들에게는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 분명했기에 비틀즈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이 곳을 들른 순례자(?)들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조심스레 비틀즈를 추억했다. 나 역시 그랬다. Abbey Road는 생각보다 조용했고 어쩐지 경건한 느낌마저 들게 만들었지만, 내 몸에 와 닿던 그 곳의 공기와 사람들의 분위기는 그 어떤 파티장보다도 차분하게 흥분되어 있었다.

비틀즈 네 명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앨범 커버로도 유명한 바로 그 횡단보도이다. 수 많은 패러디를 낳은 앨범 커버는 그 당시 바로 옆에 위치한 Abbey Road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마친 비틀즈 멤버들이 대충대충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이 날의 녹음은 이미 팀 내의 걷잡을 수 없는 불화로 해체가 기정 사실화되었던 그들의 마지막 작업이었다.

Abbey Road 스튜디오는 일반인들은 들어갈 수 없게 울타리가 높게 쳐져 있었고 철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아직까지도 실제로 많은 유명 가수들이 이 곳에서 녹음 작업을 하고 있으며,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튜디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이렇게 굳게 문을 닫아놓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비틀즈 뿐 아니라 수많은 가수들이 녹음 작업을 했던 스튜디오를 멀리서나마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벽에 있는 수 많은 낙서들이 어쩐지 팬들의 아쉬운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했다.(그래도 낙서는 나쁜 일이다.)

Abbey Road를 뒤로 한 채 다음 향한 곳은 베이커가 221B였다. 그렇다. 셜록홈즈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베이커 스트리트다.

베이커 스트리트 스테이션. 이름부터 흥분되는 이 곳에 내렸지만, 나는 이 곳에서 셜록홈즈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이나 셜록홈즈의 흔적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 그 곳에는 그저 상업적으로 변질된 실망스러운 셜록홈즈 박물관만이 위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그래도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생각했지만, 줄이 생각보다 너무나도 길었기에 나는 그 옆의 조그마한 기념품 샵을 들어가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셜록홈즈의 팬이라면 지름신이 내릴법한 다양한 제품들이 많았으나 가난한 배낭여행자는 앞으로의 남은 여정에서 쓸 자금을 생각하며 지름신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실제 소설에 나왔던 베이커가와 현실에서 내가 마주한 장소 사이에 있는 무엇이 이런 괴리감을 만들어냈을까? 내가 소설에서 읽으며 상상했던 베이커 스트리트는 음침하고 조용한 회색빛의 거리였다. 그렇다고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느낌의 장소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장소를 상상한 것은 아니었다. 내 상상과 실제 사이에 개입한 현실의 요소들이 내게 좋지 못한 방향으로 영향을 끼쳤다. 나는 차라리 이 곳이 이렇게 박물관이 되지 않고 일반 가정집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다. 상업적으로 변질된 그 거리가 내겐 너무나도 낯설었다.


때로는 내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던 장소를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때도 있다. 상상 속에는 길에 늘어선 관광객들과, 부족한 자금사정, 내 생각과는 달리 상업적으로 변질된 셜록홈즈의 집이 없기 때문이다.

베이커가에서의 실망감을 뒤로 하고 나는 이번엔 두 번째로 영국 드라마 셜록의 촬영지를 찾아갔다. 이번엔 지하철이 아닌 2층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언젠가 한번 2층 버스의 맨 앞에 앉고 싶다는 생각을 여행 내내 하고 있었는데, 마침 운 좋게도 2층 버스의 앞에 앉아 셜록의 촬영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2층 버스의 앞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건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없는 버스의 2층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내게 낯섦의 공간이자 여행의 공간이었다. 이런 2층 버스의 앞에서 촌스럽게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으니 어느덧 셜록의 촬영지에 도착했다.


셜록은 아서 코난도일의 원작 소설 셜록홈즈를 현대적으로 무척 잘 재해석해낸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영국 드라마다. 원작 소설인 셜록홈즈의 팬들이 원하는 부분을 충분히 충족시켜주면서도 세세한 디테일을 현대적으로 잘 살린, 그야말로 셜록홈즈 덕후들을 열광하게 만든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을 보유한 인기 드라마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베네딕트 컴버배치라는 배우를 우리나라에 알린 결정적인 드라마이기도 했다. 원래도 각종 드라마나 영화 등에 자주 등장하는 배우였지만, 그를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에 각인시킨 작품은 셜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기야, 같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하는 셜록홈즈는 정말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다. 중저음의 보이스로 섹시하게 사건 현장을 브리핑하는 모습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나사 빠진듯한 모습을 보이며 여자들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치명적인 매력의 남자라니...(??)


영드 셜록의 팬이었던 나는 극 중에 등장하는 셜록의 집 밑에 SPEEDY'S라는 음식점이 실제로 있는 곳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무작정 그 집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Speedy's Sandwich & Bar는 그냥 이름으로 구글맵에 검색하면 바로 떠서 생각보다 찾기 쉬웠다.

드라마에서 셜록은 영국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교통수단, Black Cab을 주로 타고 다닌다. 이 식당에 도착하니 셜록이 집에서 나오면서 Cab~! 을 외치는 장면이 자연스레 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니들 그만 좀 싸워
셜록때문에 빡친 왓슨

셜록홈즈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의 단짝 왓슨 박사를 함께 떠올린다. 배트맨과 로빈, 오성과 한음, 덤 앤 더머(?), 톰과 제리(??)처럼말이다. 사실 이런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명콤비는 장르 불문, 시대 불문 현실과 상상 속 그 어디든지 존재해왔다. 셜록과 왓슨 박사 역시 그런 명콤비에 포함되어도 전혀 손색없을 최고의 추리듀오이자, 서로에게 완벽한 파트너로 알려져왔다.

이 골목길은 당장이라도 눈 앞에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나타나서 Cab! 을 외치며 런던 시내를 누비고 살인 현장을 둘러볼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음침했다기 보단 생각보다 차분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내가 베이커가 221B에서 원했던 분위기가 바로 이런 분위기였다. 나는 가상의 베이커가 221B에서 내가 원하고 상상했던 베이커가 221B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근처를 둘러본 뒤 SPEEDY'S에서 가볍게 식사도 했는데, '브랙퍼스트'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점심 즈음 먹었던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는 나쁘지 않은 맛을 보여줬다. 다만,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같은 음식이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는 점은 역시 말로만 듣던 대로 영국의 식문화가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아이러니했다. 스크램블 에그와 베이컨, 구운 양송이 버섯 등이 맛 없기도 참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 곳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나는 생각보다 이르게 끝난 일정에 또 한번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예약해둔 런던아이를 타기까지 약 다섯 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던 나는 발걸음을 대영박물관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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