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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Nov 06. 2015

자유는 종종 불안을 동반한다

(2014.12.30, in London, UK)  - 2

일상에  허덕이며 해야만 하는 일들을 처리하고 또 처리했음에도 여전히 눈 앞에 끝도 없이 쌓여있는 일들을 마주 할 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런 나날들이 반복되면 알 수 없는 무기력감에 빠져들게 되고, 결국 우리는 일상을 벗어나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행이라는데에 생각이 미친다. 그리고 어느덧 기차나 버스, 비행기에 몸을 싣고 미지의 장소로 여행을 떠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하지만 이렇게 떠난 여행에서도 우리는 불안하다. 역설적이게도 이때 느끼는 불안과 무기력감은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에서 비롯된다.


여행을 하다 보면 내게 주어진 자유를 주체할 수 없어 불안할 때가 있다. 내가 아무리 혼자 하는 여행,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자유롭게 하는 여행을 선호한다 할 지라도 매번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자유에도 최소한의 구속은 필요한 법이다. 예를 들자면 적어도 정해진 목적지가 한 두가지 있는 선에서 동선이 자유롭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불교에서라면 속세의 규칙에 길들여진 어리석은 중생의 불안감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하루아침에 깨달음의 반열에 오른 부처가 될 수는 없는 법. 어리석은 중생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유로워지는 삶을 갈망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자유는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옥죄어온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우리는 어느덧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 불안해한다.

런던에서의 본격적인 일정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던 날 내가 느낀 불안감은 이렇듯 주체할 수 없는 자유에서 비롯됐다. 이미 세워놨던 계획은 예상보다 훨씬 이르게 끝이 났고, 오후에 예약해 둔 런던아이를 타기까지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 내게 주어져있었다. 계획하지 않고 다니는 여행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던 나였지만, 머나먼 타국에서 주어진 다섯 시간의 애매한 자유 속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불안했다.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강박적이 되어있었다. 시간은 제한적이었고, 나는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그래서였을까, 이 날은 런던에서 가장 많은 장소를 다녔던 날이기도 하다. 런던을 돌아다닐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과 내게 주어진 많은 시간들. 때문에 나는 런던에서 보고자 했던 장소들을 마치 순례자처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들렀던 곳은 '영국에 왔으니 한번 구경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들렀던 대영박물관이었다. 영국이 수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던 시절, 다른 나라로부터 약탈해 온 각종 유적과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그래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박물관임에는 틀림없었다.(그리고 이 곳 역시 입장료는 무료다.)

하지만 평소 유물, 유적 등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내게 대영박물관은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다. 웅장한 모습의 건물이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나는 그 넓은 대영박물관을 구경하는데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한국관이 흥미롭긴 했지만 우리나라 박물관에서 보는 것만 못했다. 나는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수 많은 유물을 보며 그것들에 감동을  받기는커녕 역시 그 나라의 유물과 유적은 그 나라 안에 있는 박물관에 직접 가서 봐야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나마 시계덕후인 내 흥미를 끌었던 전시물. 시계의 역사가 나열되어 있었다. 이마저도  대부분 알고 있었던 내용인지라 슬쩍 보고 넘겼다.

대영박물관에서 최소한 두 시간은 있을 줄 알았지만 금방 흥미가 떨어져 채 한 시간을 채우지 못했던 나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대영박물관을 나와서 정해진 방향도 없이 떠돌던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우선 무작정 옥스포드 스트리트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한국에 있는 동생과 메신저를 주고받다가 근처에 오아시스의 앨범 커버를 찍은 Noel Street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왜 진작 얘기해주지 않았느냐며 타박(...)을 했다). 구글맵을 검색해보니 실제로 Noel Street라는 이름의 거리가 존재했다. 그 곳은 옥스포드 스트리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었다.

노엘 겔러거의 이름을 딴 거리인지, 혹은 크리스마스의 다른 이름인 Noel에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거리 이름이 먼저 생겨나고 노엘이 자기 이름을 따서 지은 거리라며(우겨서) 앨범커버를 촬영했을 것 같은 곳이었다.

저 멀리 앨범 커버에서 보았던 익숙한 건물의 모습이 나타났다. 가까이 가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아파트가 아닐까 싶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네모반듯한 건물이 오아시스의 앨범 커버에 등장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찌나 신기해 보이던지. 그렇게 찾아간 노엘 스트리트는 기껏해야 두 블록 정도의 작은 골목길이었다. 처음 노엘 스트리트라는 표지판이 보인 길에서 몇 블록 더 들어오니 앨범의 커버를 찍은 곳과 같은 모습의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사람이 훨씬 더 많고 차들이 여러대 있긴 했지만 분명 오아시스의 2집 앨범 커버를 촬영했던 장소였다. 분명 오아시스의 멤버들도 이 거리를 바라보고 이 거리에 서 있었으리라.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현실감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아 내가 지금 이곳에 어떻게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수 없이 떠올랐다.


유럽여행에서는 이렇게 현실로 직접 마주하고 있음에도 전혀 현실 같지 않은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고 동경해오던 장소를 실제로 내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때의 그 기분이란, 정말 여행에서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느낄 수 없는 경험일 테다. 실제 같지 않은 현실을 직접 경험하는 기분은 여행에서만 맛볼 수 있는 기분 좋은 자극이다.


런던에서 오아시스의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앨범을 앨범의 커버를 직접 찍은 곳에 서서 듣고 있었던  그때의 그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내 주변을 지나던 행인들도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하는 내 표정을 보고선 다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건 영국 제2의 애국가라고도 불리는 Wonderwall을 부른 밴드 오아시스에 대한 그들의 애정 어린, 그리고 자부심 넘치는 시선이었다. 나는 그 거리에 한참을 서서 그들을 부러워하고, 오아시스를 느끼며 내 생에 잊지 못할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여행이 현실을 벗어나 환상을 좇아가는 여정이라면, 사소하지만 평소에는 절대 꿈꾸지 못할 일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그 순간이 바로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작지만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일지도 모른다.


노엘스트리트에서 한참 동안이나 감격에 겨워하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음 목적지였던 코벤트 가든 마켓으로 향했다.

코벤트 가든 마켓은 영국에서 가장 큰 마켓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시장과도 같은 곳이(마켓을 한글로 번역하면 시장이긴 하다.) 바로 이런 크고 작은 여러 마켓들인데, 직접 가서 본 느낌은 시장보다는 복합 쇼핑몰에 더 가까웠다. 우리나라에서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시장보다 깔끔했고, 정돈이 잘 되어있는 느낌이었다.

도착했을 때 코벤트가든 마켓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니 혼자라는 외로움도 잊은 채 마음 한켠이 따뜻해졌다. 어쩌면 크리스마스는 종교를 불문하고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기 위해 필요한 기념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코벤트 가든 마켓의 내부로 들어가자 천장에 달려있는 커다란 공 모양의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사람들 역시 삼삼오오 모여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나도 어딘가 앉아서 차분하게 음식을 먹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소심한 성격 탓에 그저 그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나는 여행 내내 그랬다. 소심했고 또 소심했기에 외국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 다른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씩이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여행법이 존재한다. 사람들을 만나서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거운 일일 테지만, 나에겐 그것보다 조용히 사람들을 감상하는 편이 더 즐거웠다.(물론 영어울렁증도 매우 큰 이유였다).

코벤트 가든 마켓에서 한국에 있는 동생이 생각나 향수 하나를 산 뒤에 나는 서머셋 하우스에 있다는 커다란 스케이트장을 구경하러 이동했다.


어느덧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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