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의 어느 찻집
Vintage(vin·tage): [형용사] 고전적인, 전통 있는, 유서 깊은
최근 이 빈티지라는 형용사가 유행처럼 떠올랐다. 처음에는 패션 쪽이나 고가구를 수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간혹 쓰이는 듯했지만, 요즘은 다방면에 걸쳐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특히 카페 인테리어에서는 내장재를 그대로 드러내는 노출 인테리어와 더불어, 오래된 고 주택을 개조해 고가구들을 들여놓은 ‘빈티지’한 컨셉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빈티지보다는 앤티크가 더 어울리는 표현이기도 하다. (빈티지나 앤티크나 둘 다 애매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러나 빈티지 혹은 앤티크를 잘못 해석해 그저 고풍스러운 원목 가구와 하늘거리는 하얀색 천, 낡은 소품들을 놓으면 빈티지라는 키워드가 완성되는 줄 아는 카페들도 상당히 많다. 그런 카페에 들어서면 말쑥하게 정장을 입은 광화문 직장인이 슬리퍼를 신고 출근한 듯한 인상을 받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부조화, unbalance 그 자체라는 뜻. 이는 가게에 대한 철학 없이 그저 유행을 따른 데에 대한 결과인 경우가 많다. 가게를 운영함에 있어 꼭 대단한 철학까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가게를 마주할 때마다 적어도 본인의 가게가 어떤 모습으로 고객들에게 다가가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는 하는 것이 주인의 마음가짐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카페 이정의댁 역시 빈티지가 컨셉인 카페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던 어중간하고 어수선한 빈티지 인테리어는 확실히 아니다. ‘고풍스러움’이라는 표현이 적확하게 들어맞는 곳이다. 공간에 대한 주인의 확고한 생각이 잘 자리 잡고 있는 카페라는 인상은, 내부의 테이블 배치에서부터 드러난다. 대부분 빈티지 인테리어의 가장 큰 단점(이자 내가 싫어하는 점)은 바로 빈티지가 아니라 ‘빈티’나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오래된 물건들을 통일성 없이 잡다하게 쌓아둬서 발생한 문제일때가 많다. 그러나 이곳은 어수선하다는 느낌 없이 깔끔하고 아늑하다. 이는 테이블마다 간격을 넓게 둔 것과, 가게의 중앙에 테이블을 두지 않고 인테리어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님들을 한 명이라도 더 받기 위한 인테리어로써는 분명 효율적인 공간 활용은 아닐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테리어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은 손님들에게 공간이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가지고 있다는 것일테다. 이 같은 공간활용은 빈티지가 주는 특유의 아늑한 느낌 역시 극대화하고 있다.
이정의댁은 인테리어뿐 아니라 디저트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곳의 시그니처 디저트인 물방울 케이크는 제누와즈 위에 무스를 채워넣고, 글라사주를 입혀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케이크다. 내가 시킨 것은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로제라는 이름의 케이크였는데, 크림치즈 무스와 아마도 베리 종류인 듯 한 무스가 들어가있는 케이크였다. 겉면의 바닥에는 코코넛 가루가 뿌려져있어 식감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먹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동그랗고 예쁜 비주얼은 SNS에서 본 그대로였다. 음식을 주문하면 라탄으로 만들어진 쟁반에 담겨 나오는데, 여기서 작은 곳에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장소라는 느낌을 받았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곳까지 세심하게 생각하고 만든 장소는 늘 사람을 감탄하게 만든다. 이정의댁은 그런 섬세함이 돋보이는 곳이었다.
소위 말하는 SNS에서 유명해진 카페나 음식점들은 물론 실제로 그곳에 방문해보면 실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정의댁처럼 기대 이상의 장소인 경우도 있다. 물론 사람이 붐비지 않는 시간에 갔기 때문에 공간의 특징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좋은 공간이 주는 인상은 사람이 많든 적든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이정의댁 인스타그램에는 '때와 흐름에 관하여'라는 문장이 적혀있다. 할머니의 오래된 감귤 창고를 손녀가 물려받아 탄생한 이 카페를 나타내기에 저 인스타그램의 소개 문구 만큼이나 정확한 표현이 또 있을까. 서귀포시 중문 근처에 왔다면 이정의댁에 들러 햇살이 따사로이 들어오는 창가에서 밀크티와 무스 케이크를 먹어보자. 아마 옛 경성의 어느 찻집에 온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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