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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Jul 01. 2019

모두의 글 지문, 저마다의 쓸모

따뜻하거나 차갑거나

살다 보면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생뚱맞게 보고 있는 풍경과는 전혀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날이. 그날도 그랬다. 나는 조카의 돌스냅을 찍어준 뒤였고, 익선동 골목길을 아무 의미 없이 걷고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시각정보는 파편화되어 흩어졌다. 눈으로 보는 장면이 머릿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생각을 이끌어내지는 못하는 날이었다. 볕이 좀 따스했고, 얼굴에 다가오는 바람은 차가운 겨울날이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람 가득한 익선동을 걷고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긴 글을 쓸 수 없는 거지.


뒤이어, 만약 쓴다 하더라도 그건 꽤나 큰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문득 친한 후배가 술자리에서 했던 말이 연이어서 떠올랐다.


- 선배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어 보인다고.


그 말은 그러니까, 내가 무슨 냉혈한이라거나 그런 건 아닌데, 내 글을 보고 있으면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기대치가 상당히 낮아 보인다는 거였다. 겉으로는 다정해 보이지만 사실 그건 나를 둘러싼 세계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일 뿐이며, 그런 나의 관점이 글에서도 드러난다고. (물론 술에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 나눈 대화였기 때문에, 확실한 내용은 기억나질 않는다)


그 말을 듣고선 한참을 내가 쓰는 글과, 끌리는 주제들과, 쓰고 싶은 이야기들을 떠올려봤다. 내 글은 인간에 대한 애정보다는 늘 어딘지 묘하게 냉소적이고 관찰자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건 에세이보다 아직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앞으로도 공개되지 않을 내밀한 글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곤 했다. 분명 내 이런 시선이 불편한 사람들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이에 대해 내가 누군가의 삶에 깊게 관여하는걸 두려워하는 탓이거나, 사진을 찍어오며 오랫동안 관찰자로서의 시선을 가져왔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같은 걸 보고도 나와는 너무 다른 글을 써 내려가는 사람들을 보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어떻게 저렇게 세상을 긍정적으로, 따뜻하게 볼 수 있는 걸까? 세상에 힐링이라니. 잠깐만, 내가 너무 심사가 뒤틀린 건가? 그러다 결국 나는 그냥 나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이렇게 생겨먹은걸 어쩌겠어. 세상에는 나처럼 인간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는 놈이 쓰는 글도 필요한 법이지’. 수전 손택이 말했듯이,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하고(약간 아전인수격 해석 같긴 하지만).


사람은 세계가 아니고 세계는 사람과 동일하지 않지만, 사람은 그 안에 존재하고 그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지요. 그게 바로 작가의 일입니다. 작가는 세계에 주의를 기울여요.

수전 손택, <수전 손택의 말>


생각해보면 글을 쓰는 사람에겐 글 지문이라는 게 있다. 글에서 드러나는 그 사람의 정체성, 혹은 가치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있는 개인의 문체가 말이다. 어느 누구도 같을 수 없다. 한동안 언론사를 준비하는 후배들의 작문을 봐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확실히 느꼈다. 글을 보내주는 사람이 열 명이면, 열 명의 글이 모두 다 달랐다. 안에 담긴 주제의식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장부터 단어 선택까지. 가끔은 글이 너무 그 사람과 똑같아서 피식-하고 웃음이 터질 때도 있었다.


결국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듯 똑같은 글 역시 없는 걸 지도 모른다. 냉소적인 사람도, 한없이 따뜻한 사람도 모두 세상에 필요하듯이 한없이 따뜻한 글도, 차가워서 소름이 끼치는 글도 세상에는 저마다의 쓸모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글이란 참 오묘한 것이다. 글이라는 주제 하나로 이렇게나 주절주절 또다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다니 말이다. 글만큼이나 개인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행위가 또 있을까.


뭐하자고 또 이렇게 길게 아무 말을 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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