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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Nov 14. 2019

수능, 참치 동그랑땡.

수능은 그 시절엔 인생의 전부이기도 해요

방을 정리하면서 가구를 재배치하던 와중에 우연히 2008 대학 수학능력시험 샤프를 발견했다. 무려 10년도 더 전의 수능. 저 샤프가 아직도 집 어느 구석에 있을 것이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사실 나는 수능 날의 대단한 기억 같은 건 없다. 그냥 평소처럼 일어나 평소와는 다른 학교에 가서 평소보다 약간 긴장한 채로 문제를 풀었을 뿐. 점심에 엄마가 싸준 내 최애 반찬인 참치 동그랑땡을 운동장 한편에서 먹으면서 '와, 기가 막히게 맛있네' 했던 기억이 수능 날의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도대체 왜 그 추운 날 밖에 나가서 밥을 먹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이가 들고 나서야 깨달았는데, 나는 오히려 긴장되는 상황이나 압박감이 심하게 오는 상황에서 일부러 짐짓 태연한 척하는 성향이 있었다. 보통은 허장성세라고 부르던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사실 공부도 뭐 그리 아주 빼어나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까지는 수능은 반타작이었고, 내신은 반에서 딱 중간 살짝 위 정도의 성적이었다. 중학생 때 외고에 들어가겠답시고 모든 힘을 거기 쏟아부은 것이 화근이었다. 고3 올라가기 직전 겨울에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방학 동안 도서관 문 열고 들어가 문 닫고 나오면서 성적을 전교 1등까지 끌어올렸지만, 아무튼 그건 다시 반짝이었고 성적은 완만하게 우하향 곡선을 그리고 내려왔다. 덕분에 선생님들의 눈길을 끌어 난생처음 성적이 떨어졌다고 교무실에 불려 가 팔자에도 없던 집중 관리를 받게 되었고, 그건 참 짜증 나는 상황이었다. 야자를 째고 PC방에 가서 친구들이랑 카오스를 할 수 없었으니까.


때문에 난 수능 날도 그다지 긴장이 되지 않았다. 나에게 공부는 그리 인생의 큰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잘하는 것도 못 하는 것도 아닌 성적인데, 잘 나온다면 그게 양심 없는 거지 하는 약간의 죄책감까지 있었다. 어차피 지금까지 잘해 온 성적 그대로 나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고, 운빨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냥 적당히 보통 때의 컨디션으로 풀고 나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결국 성적은 그냥 평소대로 나왔다. 실망스러웠지만 수시에서 대박이 터지는 바람에 나는 아주 운이 좋게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다. 그래 맞다. 재수 없는 소리다. 인생은 어차피 운빨 ㅈ망겜이다.


수능에 대한 내 기억은 대충 이 정도로 요약된다. 오히려 2008년 수학능력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소동들, 이를테면 완전 등급만 나오는 첫 시험이라는 점이 더 기억에 많이 남는다. 우리 때만 하고 없어진, 그래서 싸이월드에 죽음의 트라이앵글인지 뭔지 하면서 수능, 내신, 논술을 다 챙겨야 하는 불행한 세대라던 그 말들 말이다. 원체 성격이 무던한 탓인지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하고 넘겼지만, 주변 대다수의 친구들은 여전히 그때의 수능을 생각하며 치를 떤다. 30대가 된 또래들아, 그래서 잘 살고 있니...? 싸이월드 서버 죽었더라 얘들아.


나이가 들고 나면, 불과 10년이 조금 더 지나 띠동갑들이 수능을 보는 때쯤이 되면, 수능은 정말 그냥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아주 흥미로운 사건 중의 하나 정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나도 그때는 죽을 것 같았겠지만,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져 참치 동그랑땡 정도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 것이다. 오늘 수능을 치른 수험생들에게도 분명 이런 시기가 올 것이다.


그렇다고 살다 보면 수능보다 더 힘들 일도 있으니 좌절하지 말라는 어른들 말은 구라였다. 수능보다 힘든 건 인생에 그리 많지 않았다. 안 그럼 왜 고시 치는 놈들이 '수능 때처럼 공부했음 1년 만에 붙었겠다'라는 말을 하겠는가. 그걸 인생에서 다시는 할 수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다. 때문에 수능 성적이 인생을 좌우하지 않는다, 수능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수능 못 봤다고 너무 좌절하지 말아라 하는 얘기는 하지 않겠다.


왜냐면 수능은 그 시절 인생의 전부고, 인생을 좌우하진 않더라도 심각하게 경로를 변경할 정도는 된다. 수능 하나만 보고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 하에서 달려온 이들에게 열아홉 인생의 기쁨과 좌절의 모든 것이 거기 달려있지 않다고 한다면, 도대체 이들에게 너넨 지금까지 뭘 보고 달려왔다고 해줄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으니까.


이 글을 보는 이들 중에 수험생이 몇이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오늘은 당신 인생이 많이 바뀌는 날일 수 있다. 분명 그런 날이다. 현역으로 대학에 가든 재수로 가든 삼수로 가든 사수로 가든, 나는 수능 날 이후로 내 인생이 분명 어느 분기점을 넘어섰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또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건, 바꿀 수 없는 노선은 어디에도 없다. 철로도 돌고 돌아서 다시 뒤돌아 가거나 하면서 제대로 갈 수 있고, 인터체인지에서 잘못 빠졌어도 1시간 정도 삽질하다 보면 결국 제대로 찾아가기는 한다. 결국 오늘 수험생인 그대가 해야 할 것은-일단 신나게 놀고-이제 인생의 모든 것이 내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 그 하나를 뼈저리게 깨달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깨닫는 일이다. 인생은 실전이야 삐-


수험생 분들, 수고 많았습니다. 그리고 인생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그리고, 수능 갖고 뭐 대수가 아니다 힘든 일이 더 많다 하는 꼰대스러운 말 하는 어른들 말씀은 새겨듣지는 마시고 적당히 듣으십시오. 뭐... 아예 틀린 말도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거든요. 제가 하는 말도 마찬가지고요, 찡긋. 참치 동그랑땡이나 먹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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