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욱 Nov 23. 2015

국경을 넘는 기차

(2014.12.31, in London, UK)

유럽여행을 하면서 가장 낯설었던 건 국경을 넘는 일이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심지어는 걸어서도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나라 간의 이동이 이렇게 쉬울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다른 차원의 일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만 자라 온 나에게, 다른 나라를 간다는 것은 보통 비행기를 타고 멀리 이동해야 함을 의미했다.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일뿐만 아니라 국경이라는 단어 자체가 내게는 생소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 사는 나에게 가장 가까운 국경은 38선이었다. 넘을라야 넘을 수 없는 선. 국경을 넘는다는 말의 의미는 내게는 38선을 넘는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그런 나에게 나라 간의 이동, 국경의 이동이 자유로운 유럽은 당연히 신세계일  수밖에 없었다.


2014년 12월 31일은 그런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국경을 넘는 기차를 타는 날이었다.


전날 저녁 숙소를 나서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짐만을 남겨둔 채 캐리어를 꾸렸다. 나에게 여행의 유의어는 이동이었다. 이동하기 위해서 여행자는 어딘가에 풀어낸 짐을 그 곳에서의 여행이 끝난 뒤엔 다시 싸야 했다. 여행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이동이라는 단어라면, 풀어낸 짐을 다시 싸는 일은 모든 일의 시작이자 여행을 위한 성스러운 행위였다. 그리고 이 행위는 마치 다음 번 여행을 위한 이번 이동도 무사히 끝마쳐 꾸린 짐을 다시 풀어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종교의식과도 같았다.

기차를 타기까지 시간적인 여유가 있던 나는 예정대로 리치몬드 근처로 아침 산책을 나왔다. 런던에 머물던 기간 동안은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면 밤이 늦어서야 들어왔기에 아침 시간에 바라 본 리치몬드 시내는 낯설었다. 밤의 리치몬드와는 (당연하게도)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조용하고 차분했지만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지는 마을이었다. 부자들이 사람들이 사는 동네란 소리를 들어서였을까, 산책길에 마주친 사람들의 표정에선 어쩐지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그들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여행자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여유를 부리며 시내를 천천히 통과해 마을 근처의 템즈강변으로 걸어갔다. 전날 주인 부부에게 조언받은 루트대로 시내를 통과해 리치몬드 힐에 올라 템즈강의 전경을 구경한 뒤, 리치몬드 공원을 둘러보고 피터샴 미도우를 통과해 다시 숙소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리치몬드 힐로 오르는 길의 템즈 강변으로 내려오자, 런던 시내에서 봐왔던 템즈강과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그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이었다. 새벽 안개가 차분하게 깔린 강변에는 작은 보트들이 한가로운 듯이 정박해 있었고, 다소 을씨년스러울 수 있었던 한겨울의 나무들도 겨울 아침의 차분한 햇살과 어울려 운치 있게 느껴졌다. 앙상한 나뭇가지는 오히려 새벽 안개와 어우러져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여행을 할 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이렇듯 무방비 상태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맞닥뜨릴 때가 아닐까. 평화로운 템즈강을 배경으로 마을 주민 몇몇이 아침 운동을 즐기고 있는 풍경은 내가 갖고 있던 영국에 대한 이미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점잖으면서 과하지 않으며 요란스럽지 않은 모습. 그럼에도 영국의 날씨를 나타내려고 애쓰는 듯이 보이는 강가의 희뿌연 안개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어쩐지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나오는 첫 장면이 떠올랐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김승옥, 무진기행

런던 시내에서 봤던 템즈강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맘에 들어 나도 모르게 실소가 계속해서 터져나왔다. 첫눈에 반한 나만의 장소를 마주친 행복감에 터져나온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이 곳에 숙소를 잡았음에 감사했다. 숙소를 여기 잡지 않았더라면 이른 아침 리치몬드의 이 풍경은 보기 힘들었을 테다.

그래서 좀처럼 여행지에 대해 조언을 하지 않는 내가 런던을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는 장소가 바로 이 리치몬드다. 주요 관광지들과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한적하게 거닐다 보면 어느덧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어 진다. 그리고 이렇게 걷다 보면 온갖 일상 속 고민들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아침 일찍 동네 주민이라도 된 듯 한가로이 산책하며 풍경의 도움을 받을 때 더 절실하게 다가올 것이다. 여기서 나는, 내가 동경하던 삶의 방식을 접했다.

천천히 걷다 보니 Terrace Gardens에 도착했다. 이 곳을 올라가면 Richmond Hill이 나오고 멀리 보이는 템즈강을 따라 장관이 펼쳐진다고 들었던 바로 그 곳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전날 주인 부부는 언덕 꼭대기에 올라 뒤를 돌아봤을 때 보이는 그 풍경이 정말 최고라며, 언덕의 끝에 오르기 전엔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다. 언덕을 오르면서 어제의 그 말이 생각난 나는 뒤를 돌아봐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가 된 기분을(...) 느끼며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뒤를 돌았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실로 놀라웠다. 리치몬드를 둘러본 이 날의 오전은 매 순간이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리치몬드는 이 곳이 런던인가 싶을 정도로 내가  그동안 봐왔던 런던과는 확연히 달랐다. 사진을 아무리 찍어봐도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아름다운 리치몬드의 풍경은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 나는 이내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눈으로 그 풍경을 감상했다.


사진 찍는 일에 정신이 팔려있다 보면, 가끔 내가 이 풍경을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인지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보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문득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내 몸의 감각으로 느껴야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곤 한다. 때로 멋진 풍경은, 단순히 보이는  것뿐 아니라 그 순간의 분위기와, 그 장소의 공기와, 바람의 냄새 등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기도 한다.

언덕에서 내려와 리치몬드 공원으로 가는 길은 조용했다. 길가엔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속에 섞여 함께 걷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시간과 일상적이지 않은 특별한 시간들이 서로 뒤섞이는 순간이었다.

리치몬드 공원은 하이드파크의 약 세 배 정도 되는 거대한 크기의 공원이었다. 공원이라기보단 거대한 들판 같은 느낌의 이 공원을 한 시간 남짓만에 전부 둘러보는 일은 불가능했다. 주인 부부는 공원이 너무 거대해 시간이 모자랄 것이라며 입구 부분만 보고 오는 것을 추천했다. 하루 종일 리치몬드에 쏟을 수 있었다면 공원 전체를 둘러봤겠지만, 예매해 둔 기차시각도 있었기에 그 말을 듣기로 했다. 그들에게서 리치몬드 공원에 사슴들도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운 좋게 사슴들을 마주할 수 있길 기대했다.


이런저런 기대를 잔뜩 안고 들어선 리치몬드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압도한 건 드넓은 들판을 비추던 런던의 아침 햇살이었다. 리치몬드 공원은 런던 시내에 있던 공원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니, 그동안 내가 봐왔던 어떤 공원도 이렇진 않았다.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나 나올 법한 그런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기대가 헛되지 않은 순간이었다. 오히려 여타의 공원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내가 이 곳을 겨울에 왔음에 감사했다. 나를 압도한 리치몬드의 모습은 헐벗은 나목들과 말라버린 덤불이 어우러져야만이 나올 수 있는 풍경이었다. 마치 영화 빅 피쉬(Big Fish)의 포스터에 나온 모습 같기도 했다. 헐벗은 나무가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새로운 생명을 얻고 있는 듯한 광경은 일종의 숭고미마저 느껴졌다. 이런 모습들은 내가 봄이나 여름에 왔다면 볼 수 없었을 절경이었다. 눈길 닿는 곳 하나하나 전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는 눈으로 리치몬드 공원의 아름다움을 부지런히 탐하고, 카메라로 그 광경을 영원히 남겨보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리치몬드 공원의 풍경은 하나의 노래였다. 햇살과 구름, 적당한 공기의 내음과 넓은 들판, 장엄하게 서있는 나무들 까지 그 모든 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교향곡과도 같았다.

리치몬드 공원을 지나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피터샴 미도우(Petersham Meadow)는 넓은 목초지였다. 주변에 나무가 거의 없고 너른 잔디밭이 지평선을 이루고 있던 그 곳은 길게 뻗은 오솔길과 어쩐지 음산한 날씨가 어우러져 마치 살인사건이나 미스터리 드라마에 나올법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습한 런던의 겨울은 아침나절 이 곳에 위치한 잔디들에 하얗게 서리를 입혀놓았다. 녹색이어야 할 잔디들이 내뿜는 회색빛이 음울한 분위기를 한층 더 실감 나게 만드는  듯했다.

피터샴 미도우를 지나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숙소로 향했다. 아침 일찍 걸었던 길은 그 사이 많이 달라져있었다. 아침과는 달리 날은 점점 흐려져 구름이 끼고 있었다. 숙소로 다시 돌아가는 길은 아까 걸었던 길이었음에도 그 전엔 보지 못했던 것들도 보였다. 바로 세상을 떠난 누군가를 기리며 사랑하는 이들이 만들어두었을 벤치들이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리는 가족들의 마음이 전해져 어쩐지 마음이 짠해졌다. 벤치엔 'Fond memories of days enjoyed by Richmond Riverside'라고 적혀있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가 사랑하는 가족이다. 아직 싱싱한 꽃다발은 여전히 가족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벤치 앞에서 숙연해졌다. 무덤에 가서 죽은 이를 기리는 것도 의미 있지만 이런 벤치에 앉아 세상을 떠난 이를 추억한다면 행복한 기억들을 더 많이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저 벤치에 적힌 문구를 보니 벤치의 주인을 기억하는 이도 이 곳에서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고 싶은  듯했다. 리치몬드는 그 곳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숙소에 가기 전, 시내에 들러 주인 부부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선물하고자 했던 건 다름 아닌 전날 대화 중 아내분께서 좋아한다고 얼핏 말했던 허밍버드 베이커리의 레드벨벳 케이크였다.

허밍버드 베이커리는 영국의 유명한 케이크 전문점이다. 리치몬드 뿐 아니라 런던 시내 곳곳에 지점을 갖고 있는 곳이었는데, 이름부터 인테리어까지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꾸며져 있었다(베이커리 이름이 콧노래 부르는 새라니!파x바게트 같은 이름과 비교된다). 흔히 체인점을 갖고 있는 프랜차이즈라면 음식의 맛에 대해 어느 정도 기대감을 낮추게 마련인데, 허밍버드 베이커리는 그런 예상을 산산조각 낸 곳이었다.


케이크를 사들고 집으로 온 나는 주인 부부에게 줄 컵케이크는 옆에 두고 내가 먹기 위해 사 왔던 레드벨벳 케이크를 먹어보았다. 포크로 잘게  잘라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여행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음식을 제대로 안 먹고 다녔는지 깨달았다. 런던을 떠나기 몇 시간 전에 맛본 레드벨벳 케이크는 지금도 잊지 못할 맛이었다. 물론 여행지에서 먹는 음식은 무엇이든 맛있다지만, 단순히 여행지에서의 낭만이 불러낸 맛은 아니었다. 달달한 케이크는 런던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기에 한치의 모자람 없는 선택이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주인 부부에게 케이크 선물은 남겨둔 뒤, 숙소를 나왔다.


그들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렇게 호의를 베풀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여행에서의 낭만 때문은 아니었을 테다. 아니, 오히려 여행에서의 낭만을 충족시켜준 그들에게 두고 갈 수 있는 것이 자그마한 케이크 밖에 없어서 나는 아쉬웠다. 그들 덕분에 나는 여행을 하며 사람을 만나는 재미를 긴 여행의 시작부터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그 날 아침의 느낌이 내게 전해져 오는 듯하다. 주인 부부가 나간 뒤 조용한 집 거실에서 홀로 그들을 위한 선물을 조용히 놓고 나오던 그 날의 감정과. 그리고 내 작은 호의에 고마워할(지는 모르겠지만) 주인 부부의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해하는 내 모습까지. 때로 우리는 호의를 받을 때 보다 호의를 베풀 때 더 큰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캐리어를 낑낑거리며 지하철을 타고 유로스타를 타기 위해 세인트 판크라스 역으로 가는 길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유로스타를 타러 가는 길에 세인트 판크라스 역을 봤고, 사진을 몇 장 찍었으며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해리포터의 촬영지도 구경하고, 역에서 노년의 신사가 열정을 다해 치던 피아노 곡을 감상했다. 별다를 것 없는 조용한 기다림이었다. 한 시간 뒤에 국경을 넘는다는 일이 실감 나지 않을 만큼이나 조용하고도 평화로운(?) 시간들이었다.


역에는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이동을 하거나, 이동을 해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세인트 판크라스 역은, 보이지 않는 국경의 교차점이었다. 기분 좋은 들뜸과 설렘이 가득했던 곳, 행선지를 나타내는 자그마한 수천 개의 LED 전구들이 점멸하는 곳, 어쩐지 운율 있는 안내방송의 멘트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곳. 그곳에서 나는  난생처음 유로스타에 몸을 실었다.


이윽고 기차는 육중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플랫폼을 출발했다.


기차는, 그렇게 국경을 넘어가고 있었다.


두 시간 남짓을 달릴 기차의 도착지는 프랑스, 파리였다.

Copyright 2015. 정욱(framingtheworld) all rights reserved.  

매거진의 이전글 런던의 마지막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