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욱 Dec 01. 2015

2015년 1월 1일의 에펠탑

(2014.12.31-2015.01.01 in Paris, France)

그가 내린 곳은 파리 북역이었다. 기차역에 도착해 무거운 짐을 갖고 내렸을 때 그가 본 것은 낭만적이지도, 우아하지도 않은 파리의 적나라한 민낯이었다. 런던에 비해 음습한 모습의 파리 북역은 새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사람들의 무질서로 가득했다. 술에 취해 비틀대는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코를 찌르는 악취, 그리고 역 곳곳에 널려있는 노숙자들. 파리의 첫인상은 그가 좋아하는 추리소설의 도입부로 써도 손색없을 모습이었다. 낯선 모습에 당황한 그는 빠른 걸음으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 역을 향해 걸어갔고 그 순간, 누군가 그의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치고 간 사람들 보려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쩐지 역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듯했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법한 이 문단은 내가 파리에 도착해 느낀 그대로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너무 큰 기대를 해서였을까, 파리의 첫인상은 내게 공포 그 자체였다. 벌써 익숙해져 버린 런던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 무질서. 그리고 다른 언어. 런던에 비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건장한 체구의 흑인들의 모습까지(인종을 비하할 의도는 없다. 하지만 나보다 체격조건이 월등한 그들에게서 위화감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해 프랑스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도 있었고 프랑스어도 어느 정도 보고 들을 수 있는 정도는 됐지만, 그럼에도 파리는 낯섦 그 자체였다. 아마도 늦은 저녁시간 도착해 지칠 대로 지친 내 몸과 마음이 본능적으로 위험신호를 보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파리는 처음부터 내 모든 환상을 비웃기라도 하고 있는  듯했다. 10일간 머물기로 했던 파리에서의 앞으로의 일정이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했다. 파리의 북역이 치안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곳이란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막상 사진으로 봤을 땐 사랑스러운데, 왜 그땐 그렇게 무서웠을까.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가는 길은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여정이었다. 지하철역에선 한 손에 와인병을 든 채로 비틀거리는 청년들과 플랫폼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뒤섞여있었다. 새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만의 축제를 벌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여행자에게 그런 이들은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괜한 시비에 말려들지는 않을지, 언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에서 그런 상황이 온 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숙소로 향했다.

런던에 언더그라운드가 있다면 파리에는 메트로가 있었다. 파리의 메트로는 런던의 언더그라운드 표지판 보다 음침한 느낌이 드는 디자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전공이 불어불문학이라 조금이나마 프랑스어를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표지판을 읽고 길을 찾아가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었으니, 늦은 시간 파리에 도착해 길을 헤매지 않고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크게 안도했다. 파리에서 8일 동안 묵을 호스텔에 도착한 나는 체크인을 위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호스텔의 1층 로비는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모여 수다를 떨 수 있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에서 가볍게 맥주나 와인 등을 사서 마실 수도 있었으며, 간단한 취사도 가능했다. 이미 나보다 먼저 숙소에 도착해 있던 여행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거나 가볍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파리에서 처음 받은 인상 보다는 그래도 따뜻한 느낌에 안도한 나는 체크인을 끝내고 키를 건네받은 뒤 방으로 올라갔다.


도시의 분위기 뿐 아니라 여러모로 런던에서 지낼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현지에 살고 있는 한국인 부부가 맞이해준 1인실의 비앤비에서 외국인이 운영하는 호스텔의 4인용 도미토리를 쓰게 된 나는 바뀌어 버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사실 우리가 느끼는 소외감은 오히려 주위에 사람이 많을 때 더 커지고는 한다. 수 많은 인파 속에 오로지 나 혼자 외로이 떨어져 그들과 섞이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 때 우리는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로워지곤 한다. 파리의  첫날 밤 나를 관통한 감정은 외로움, 그리고 소외감이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일정은 아직 10일이나 남아 있었으니 어떻게든 적응해야 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2층 침대 두 개가 놓여 있었고, 외국인 여성 한 명이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룸메이트인 듯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나로써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서로 어색하게 'Hi'를  주고받았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배정받은 침대로 올라가 짐을 풀었다. 2층 침대의 위에서 자는 것은 처음이었다.


캐리어에서 필요한 짐들을 꺼내고 짐을 정리한 나는 와이파이를 연결해 인터넷 카페에서 동행을 구했다. 도저히 혼자서는 파리의 에펠탑 앞에서 새해를 맞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나는 사무치게 외로웠고, 밤의 파리를 혼자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행히 동행은 금방 구해졌다. 그렇게 새해를 같이 맞이하기 위해 여섯 명의 사람이 모였다. 약속 장소는 트로카데로 역 앞이었다.

늦은 저녁 시간에 나온 숙소 근처는 조용했다. 나는 약속 장소인 트로카데로 역까지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어쨌든 파리에 왔으니 걸으면서 그 곳의 분위기를 익혀놓는 것이 내게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비슷한 정서를 가진 서유럽이라 하더라도, 각각의 도시가 풍기는 분위기는 저마다 달랐다. 그것은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그 나라의 언어를 잘 알아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었다.


파리의 가장 큰 특징은 어디서든 길게 뻗어 있는 도로였다. 지금과 같은 파리의 도시구획이 이루어진 것은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였는데, 그 전의 파리는 중세 도시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좁은 길들이 미로같이 얽혀 있어서 만성적인 교통체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무질서하게 건축된 허름한 건물이 즐비했던 파리가 못내 맘에 들지 않았던 나폴레옹 3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파리 개조 사업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그는 1853년 파리 지사 자리에 오스만 남작(Baron Haussmann)을 임명하고 파리의 도시 구조 개혁을 명했다고 한다. (참조 : Wikipedia) 그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의 파리가 만들어졌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높은 건물의 건축을 허가하지 않는 등의 노력을 통해 여전히 그 모습을 유지해오고 있다고 한다.


20분쯤 걸었을까, 저 멀리 센느강이 보였다. 그리고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다리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인셉션에서 나와 더욱 유명해진 비라켕다리(Pont de Bir-Hakeim)였다. 워낙 특이하게 생겨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 다리는 인셉션 외에도 아멜리에, 택시 등의 영화에서도 등장했다.


그리고 다리에서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돌리자, 사진으로 수 없이 봐왔던 그 예의 철골 구조물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에펠탑이었다.

에펠탑을 처음 본 순간의 느낌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사진으로 너무 많이 봐 온 장면이어서였을까. 내 눈 앞에 컴퓨터 모니터가 펼쳐져 있는  듯했다. 실제로 에펠탑을 봐도 실제 같지 않았던 그 순간, 내가 에펠탑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히려 시각이 아니라 청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이었다.


비라켕 다리 위에서 바라 본 에펠탑의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했다. 그건 아마도 에펠탑의 모습이 그랬다기보다는 에펠탑을 바라보던 내 감정상태가 이입됐기 때문이었을 테다. 이상하게도 나는 파리에 있는 10일 동안 에펠탑을 바라보면서 즐거웠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첫날은 파리에 적응하지 못해 두렵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웠고 그 다음에도, 마지막 날 봤을 때도 저마다 이유는 달랐지만 즐겁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감정상태가 에펠탑을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는지, 에펠탑을 바라보면 괜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참을 센느 강변에서 에펠탑을 바라보던 나는 약속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비라켕다리에서 트로카데로 역 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가 걸렸다. 가는 길엔 한 해의 마지막과 새해의 시작이 뒤엉키는 시간의 흥분을 감추지 못한 파리지앵들이 즐비했다. 그들은 저마다 손에 와인병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들고 비틀대고 있었다. 그들 사이를 부지런히 걸어 트로카데로 역에 도착했다.  동행하기로 한 사람들은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있었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지난 여행, 그리고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이는 사이요 궁 앞으로 향했다. 아까 느꼈던 소외감과 외로움이 조금씩 사그러드는 듯 했다.

사이요궁 앞은 조용하게 분주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올해의 마지막 밤을 에펠탑 앞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우리와 함께 새해를 맞게 될 사람들이기도 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북적이지도, 소란스럽지도 않았지만 그 시간 사이요궁을 흐르던 공기는 분명 흥분되어 있었다. 그 흥분된 공기 속엔 새해를 맞는 사람들의 설렘과 그런 새해를 파리의 에펠탑 앞에서 맞이하게 된다는 우리 같은 여행자들의 설렘이 뒤엉켜있었다.

아무리 에펠탑을 바라보며 새해를 맞는 일이 낭만적이라고 한들, 추운 날씨에 두 시간 가량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일은 고역이었다. 근처에서 따뜻한 마실거리를 사 오자니 길을 잃을 것 같았던 우리는 몇 번씩이나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다행이었던 건 그래도 같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혼자 왔다면 그 길고 긴 시간을 어떻게 기다렸을까.


얼마나 기다렸을까, 핸드폰의 시계가 2014년 12월 31일 23시 59분을 가리켰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점점 더 커졌다. 그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 Ten! Nine! Eight!


우리는 다 같이 그 소리에 맞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3

2

1

잠시 뒤, 에펠탑이 반짝였다.


생각만큼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모여있는 사람들의 웅성거림만이 새해가 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에펠탑은 별 다를 것 없다는 듯이 2015년 00시 00분에도 평소 매 정각에 그랬듯 반짝일 뿐이었다.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이 된다고 뭔가가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건 아니라고. 겨우 어제와 오늘. 딱 하루 차이 날 뿐인데 왜 그리들 호들갑인지 모르겠다고. 그건 비관주의라기보단 오히려 인생에 대한 내 나름의 낙관주의에 가까웠다. 새해가 된다고 무언가를 더 열심히 하려고 생각하지 말자고. 전날과 오늘은 년도만 바뀌었을 뿐 특별할 건 없으니 모든 하루를 늘 그랬듯이 살아야겠다는, 나만의 다짐에 가까운 말이었다.


파리에서의 새해도 한국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용히 지나가는 시간, 그리고 사람들의 축하인사. 다른 것이 있었다면 장소가 파리였고, 에펠탑 앞이었고, 옆에는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새해를 맞겠다고 들떠있었을 뿐이었다. 엄청난걸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 기대에 비하면 소박하고도 조용한 새해였지만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도 새해를 맞겠다고 호들갑 떨어 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 파리의 에펠탑 앞에서 새해를 맞는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내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이벤트인 셈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한 해가 시작되고 있었고 나는 2015년의 1월 1일, 파리의 에펠탑 앞에 있었다.


Copyright 2015. 정욱(framingtheworld) all rights reserved.  

매거진의 이전글 국경을 넘는 기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