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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16. 2020

유령들의 밤

오래 전의 기억이 남겨진 장소들

친한 선배와 오랜만에 학교를 걸었다. 백양로를 지나 본관 옆 길을 걸어올라 연희관을 가로질러 종합관 언덕을 내려왔다. 몇 년 동안을 질리도록 걸어온 길이었다. 길은 다른 듯 같았다. 여전히 여름의 학교는 걷기 좋은 장소였다.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나무향이 바람에 실려왔다.


대학 시절 활동했던 방송반이 있던 건물에 도착했을 때, 선배는 자판기에서 생수를 뽑아 마셨다. 처음엔 마실 생각이 없었는데, 옛 기억도 떠올릴 겸 나도 음료수를 한 캔 뽑아마셨다. 자판기를 이용하기 위해 지갑에서 천 원짜리 지폐나 동전을 찾고 있었는데, 자판기는 카드만 가능했다. 현금이 안 되는 자판기라니. 충격적이었다. 예전엔 카드는 있어도 동전이 없어서 못 뽑은 적이 더 많았는데. 그 시절 가장 많이 마셨던 데자와와 나랑드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조금 더 밖에서 보기 힘든 나랑드 사이다를 뽑아 마셨다. 오랜만에 마신 나랑드 사이다는 니맛도 내 맛도 아닌 맛이었다. 어중간한 그 맛이 그 시절의 나와 닮아 있었다. 이 맛대가리 없는 걸 그 시절엔 왜 그렇게 많이 마셨을까. 추억을 되살리려고 이용한 자판기는 오히려 내게 그때 이후로 세월이 얼마나 많이 흘렀는지를 되새기게 만들었다.


우리는 생수와 나랑드 사이다를 들고서 아무 말 없이 마셨다. 언덕 아래로 하나 둘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감상에 빠진 공기는 고요해졌다. 저녁이 점점 내려앉고 있었다. 늘 해가 떨어지고 어둑해지기 시작할 때면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학교를 내려가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목적지는 언제가 싸구려 고깃집이었다.


감상에 빠져있을 때, 선배가 한 마디를 던졌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 꼭 유령 같다."


과거의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를 배회하며 이미 지나버린 시간을 붙잡고 놓아주지 못하는 이들. 죽어서도 이승에 미련이 남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유령 같다는 선배의 비유가 너무 좋아서 한참이나 그 말을 곱씹었다. 시간대만 다를 뿐, 과거의 윤정욱과 현재의 윤정욱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여행을 온 듯한 기분도 들었다.


우리가 유령 같다는 선배와 대화를 나누며 새삼 내가 왜 그와 친구로 지내고 있는지 깨달았다. 이런 순간에 유령과 같다는 적확한 비유를 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오그라든다거나 감상적이라고 폄훼하지 않는 사람. 시간이 지나도 오랫동안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령들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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