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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19. 2020

우리의 세계는
점점 멀어지고, 좁아질 거야

나의 친애하는 사람들에게

언젠가 김영하 작가가 한 말이 인터넷에서 회자되며 꽤 인기를 끌었다. 그의 산문집 <말하다>에 실린 글이었다.

친구를 덜 만났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 같아요. 쓸데없는 술자리에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어요.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각기 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했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 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20대, 젊을 때에는 그 친구들과 영원히 같이 갈 것 같고 앞으로도 함께 해나갈 일이 많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손해 보는 게 있어도 맞춰주고 그러잖아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은 많은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더군요. 그보다는 자기 자신의 취향에 귀 기울이고 영혼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한 거예요.


마흔이 넘어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는 김영하 작가의 저 말을 처음 봤을 땐 전부 동의하지 않았다. 내 인생에 있어서 친구는 여전히 중요했고, 타인에게 인정받고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내키지도 않는 약속을 꾸역꾸역 나가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만에 내 그런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가장 큰 계기는 주변인들의 결혼이었다. 30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지인들이 하나 둘 결혼식을 올렸다. 술자리에 불러낼 친구가 없어지는 것 정도야 섭섭하긴 해도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아예 연락조차 뜸해지는 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결혼한 친구들은 대부분 바쁜 날들을 보냈다. 결혼이란 완전히 인생의 다른 페이지를 펼친 셈일 테니, 이해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에서도 가장 바쁠 시기인 30대에 새로운 가족을 챙기고, 평생을 함께 할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맞춰나가는 일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그걸 머리로는 받아들여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정말 축하하는 마음에 결혼식을 갔다가도, 막상 결혼 이후로 아무런 소식도 못 듣고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하게 되면 일생에 있어서 다신 안 볼 사람을 위해 내가 왜 그런 수고스러움을 감수했을까 싶어졌다. 물론 축의금이 아까운 것도 사실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이렇게 옹졸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본전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결혼 이후 연락이 끊긴 사람들을 내 결혼식 때 절대 부르진 않을 텐데. 내 옆에 남지도 않을 사람들을 위해 쓴 시간과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했다. 지금도 그렇고 말이다.


결혼뿐 아니라 30대에 접어들면 인간관계가 크게 정리된다는 걸 많이 느꼈다. 사는 게 바빠서 대다수의 지인들은 1년에 두 번 보면 많이 사이가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 19로 인해 이런 일은 더 심해져서, 정말 봐야 하는 사람이 아니면 보지 않게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게다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내가 갖고 있는 에너지가 20대의 그것과 달라서, 타인에게 줄 수 있는 다정함의 총량이 점차 줄어드는 역시 문제였다. '내가 저 사람에게까지 굳이 연락을 유지하고 만남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가?'와 같은 의문을 끊임없이 갖게 되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계산적이고 차갑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계산적인 게 아니라 그냥 그럴 에너지가 없을 뿐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어찌어찌 에너지를 끌어내 가식적으로 밝은 표정을 지을 수는 있지만, 그런 관계는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가끔씩 마음이 말랑해져 진심을 내보이더라도, 그런 마음들이 무신경한 상대방에 의해 짓밟히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나 역시 자연스레 사람들에게 무신경하고 차가운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물론 그 상대는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지만, 그건 머리로나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나는 너무 많은 친구와 선후배와 지인들, 소위 말하는 '내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쓸데없는 술자리에 시간을 낭비했고, 영양가 없는 연락을 계속해서 주고받았다. 어릴 적부터 친했다는 이유로 취향이 맞지 않는 친구들과 취향을 맞추려 노력했고, 그들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춰야 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서로에게 불편한 사이라면, 그건 친구가 아니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어릴 때는 중요한 것만 같았던 술자리, 친구들과의 대화, 주고받는 연락들이 얼마나 영양가 없는 것인지를 내 주변에서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정말 중요한 건 주위의 평판 따위가 아니라 정말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었다.


물론 오롯이 나 자신일 때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지 못한 나를 보여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연기하면서 편안함을 느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나의 편안함을 팔아 만든 불편의 토대 위에는 타인의 좋은 평판이 쌓인다. 이렇게 쌓인 평판은 때로 나에게 행복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내가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 세계로부터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 하지만 이런 만족감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그리고 점차 '굳이 내가 그 세계에서 인정받고 받아들여져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올해도 몇몇의 인간관계를 정리했다. 코로나 19나 장기간의 구직활동을 핑계로 댔지만, 의지가 있었다면 얼마든지 계속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그럴 의지가 없었을 뿐이었다. 가장 큰 것은 10년 넘게 알고 지낸 대학 동기들과 멀어진 사건이었다. 표면적인 갈등이 원인인 것처럼 보였지만, 가장 큰 원인은 아마 더 이상 내가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해나갈 의지가 없기 때문이었을 테다. 10년 전과 지금의 나는 많은 것이 달라져있었고, 더 이상 맞지 않는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느라 나를 연기하는 데에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내 곁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한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과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모자랐다.


어쩌면 세계가 점점 좁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으면서 관용이 적어지고 옹졸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만 넓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황폐한 땅 보다는, 차라리 좁은 세계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의 생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의 세계는 그게 맞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결혼을 하고 싶다.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친구, 동반자, 내 세계의 중심이 될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친구 따위는 없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아마 이제는 나를 떠난 친구들도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김영하 작가도 아내와 재밌게 잘 살고 있는 듯 하니 말이다.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은 아마 평생 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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