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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Dec 24. 2015

슬럼프

별 일 없는 크리스마스

연말에 혼자인 사람들이 유난히 외로운 이유는, 사랑이 어디에나 있기 때문일 테다. 길거리 가득한 커플들과, 따뜻한 포옹을 나누는 가족들, 따스한 눈빛. 연말이 되면 우리 주변에 당연하게도 존재해왔던 사랑이란 녀석이 더 눈에 띄곤 한다. 한 해가 끝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아니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것에 대한 설렘 때문일까. 연말만 되면 사람들은 유난스럽게도 온누리에 사랑을 실천한다. 세상에 만연해있는 사랑 앞에서, 혼자인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외로워진다.

요 며칠, 꽤나 큰 슬럼프를 겪었다. 아무리 사진을 찍어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즐겁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셔터를 누르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셔터를 누르는 그 짧은 순간, 이 사진이 아님을 명백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셔터를 눌러야 하는 일은 고문에 가까웠다취미이자 직업이 되어버린

그렇게 며칠간 글도 쓰지 않고, 사진도 어쩔 수 없이 찍어야 하는 때가 아니면 찍지 않았다. 깜빡이는 커서는 내게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직업적으로 어쩔 수 없이 사진을 찍는 순간들엔 사진을 찍고 나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저 사진들을 내가 찍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웠으므로. 처참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나는 재충전이 필요했고, 휴식이 필요했다.

그렇게 2주를 보냈다. 그 사이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선 큰 행사를 준비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이 계속됐고, 제주도로 출장도 다녀왔다. 그렇게 며칠 동안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니 어느덧  크리스마스이브날이 되었다. 역시나 올해도 거리의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슬럼프를 겪고 있는 내게 길거리의 즐거운 사람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연말에 나 같은 사람들이 유난히 외롭고 쓸쓸한 이유는, 행복이 어디에나 있기 때문일 테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회사는, 조용했다.

그러다 문득, 혼자 회사에 있는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찍었다. 연말이면 반짝이는 꼬마전구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가슴 따뜻한 순간들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한 장 한 장. 그렇게 트리 앞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커다란 트리 앞에서 혼자만의 시간들을 조용히 통과해내며, 나는 나 자신이 내게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직 사회 초년생이었고, 사진을 직업으로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진가였으며, 평범한 대한민국의 20대일 뿐이었다. 요 며칠 있었던 행운과도 같은 일들에 나 자신이 너무나도 들떠있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아마도 나는 계속 외로울 것이다. 종종 슬럼프도 겪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로이 길고 긴 길을 통과해내다보면 어느 순간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앞에 산적해있는 일들을 어느 순간엔 버겁게, 어느 순간엔 여유로이 처리하다 보면 오늘처럼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슬럼프는 내게 항상 옆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슬럼프가 아니고, 의식하면 슬럼프가 된다는 사실을.

크리스마스에 행복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불행하지는 않은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크리스마스 인사엔 묘한 매력이 있다. 단어들은 동글동글하면서도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입 안에 맴도는 단어들을 꺼내 축하인사를 건넨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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