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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Dec 29. 2020

기계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서사

넷플릭스 오리지널 <퀸스 갬빗>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인간과 기계의 대결


2016년 3월, 구글의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가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이세돌 9단과의 대결로 인해 다른 나라보다 이 이벤트에 대한 대중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 해 3월엔 어딜 가나 알파고와 이세돌 얘기뿐이었다. 인간과 기계의 대결. 뉴스 기사로든 사적인 대화로든 전혀 손색이 없는 주제였다.


결과는 모두가 다 알다시피, 이세돌 9단의 패로 끝났다. 그러나 인간이 바둑 이전에 컴퓨터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어 준 영역이 있었다. 바로 체스였다.


1997년 IBM의 딥 블루(Deep Blue)는 세계 최강의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인간계 최고의 체스 플레이어, 그랜드 마스터가 기계에게 굴복하는 순간이었다. 8년 전 딥 쏘우트(Deep Thought)에게 완승을 거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였다. 이후 체스 프로그램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이제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컴퓨터를 이길 수 없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체스라는 게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최강의 존재가 나타났으나 체스라는 오래된 인류의 게임 자체가 사라지진 않았다. 왜일까?


인간과 인간의 대결

올해 나온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퀸스 갬빗>을 본 많은 이들이 호평을 내렸다. 오랜만에 볼만한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나왔단 이야기가 대다수였다. 여기엔 다양한 이유가 담겨 있을 것이다.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하는 탄탄한 스토리 구성,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단지 흑과 백의 말을 움직이는 이야기일 뿐인데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연출, 웨스 엔더슨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미장센과 화면 구도,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그러나 이 드라마에는 무엇보다 강력한 '드라마'가 존재한다.


모든 경기는 늘 드라마, 즉 서사가 함께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스포츠나 게임 경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다. 경기란 승패의 관점을 떠나서 과정 자체를 즐기는 일종의 유희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언제나 서사, 스토리가 존재한다. 언제나 약팀이 있으면 강팀이 있게 마련이고, 승자가 있다면 패자가 존재한다. 강팀의 승리에는 시원한 쾌감이, 약팀의 승리에는 반전의 짜릿함이 존재한다. 맞붙는 이들의 실력은 비등할수록 좋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경기에 더 열광한다.


드라마 <퀸스 갬빗>에도 이와 같은 서사가 존재한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세상에 내던져진 주인공 베스 하먼. 절망적 속 어린 소녀가 관리인을 통해 체스라는 세계를 알게 되고, 자신의 재능에 눈을 뜨게 된다는 설정.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앞을 가로막는 상대들을 가차 없이 무찔러나가서 결국 최고가 된다는 이야기. 일종의 무협지 서사와도 맞닿아 있는 이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주인공을 응원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요소가 들어 있다. 그리고 거기엔 결국 최고에 이르는 주인공을 보는 쾌감까지 함께한다.


기계는 흉내 낼 수 없는 것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컴퓨터라는 이길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우리가 여전히 체스를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서사가 인간 사이의 대결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인간이 컴퓨터가 압도한 분야에 계속해서 도전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보여준다. 그건 바로 인간만이 서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베스 하먼이 엄청난 실력을 갖고 있음에도 늘 불안해하며 매일같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며 응원하고, 약물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모습에서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불완전한 인간만이 기승전결과 고난 극복의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루할 수 있었던 체스 드라마가 체스 용어를 하나도 모르는 대중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바둑에 대해 잘 몰랐던 우리가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 열광했듯이 말이다.


때문에 <퀸스 갬빗>은 기계가 인간을 월등히 앞선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인간의 도전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드라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AI와 인공지능이 인류의 자리를 하나하나 차지해나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시대에, 과연 인류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내려줄 수 있는 드라마일지도 모른다. 기계는 인간의 서사를 흉내 낼 수 없다.


여담이지만, 주인공의 외모가 너무 독특하고 매력적이라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가 성공한 데에는 화려한 영상미가 포함될텐데, 그 중엔 주인공 역의 엔야 테일러 조이 역시 한몫하지 않았을까. 극중에서 그녀가 깍지낀 손을 한 채 턱을 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습에서 묘하게 베티붑이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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