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욱 Feb 03. 2016

방황의 미덕

(2015.01.03 in Paris, France) - 2

비 오는 날은 여러모로 극적이다. 비 내리는 날의 하늘을 보고 있으면 구름의 움직임이 저렇게 변화무쌍했나 싶어 지고, 빗줄기가 세차게 퍼붓는 날이면 하늘에서 물방울이 이렇게나 많이 떨어진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기도 한다. 여우비 내리는 날에는 해가 떠 있는 하늘에서 어떻게 비가 내릴 수 있나 싶어 지고,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날엔 아무 기별도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속수무책인 자신이 초라해 실소를 내뱉기도 한다. 화창한 날보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비 오는 날의 이런 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비 내리는 날이 가장 극적으로 느껴지는 때는, 비 내린 뒤의 하늘을 바라볼 때다. 격렬하게 퍼붓던 비는 그치고, 구름은 아직 소란스럽게 흘러가지만 사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청아한 그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 뚝 떼고 평온한 모습으로 내 눈 앞을 가득 채우는 하늘만큼 이질적이면서도 극적인 풍경도 드물다.


그날 파리의 장식 박물관을 나와서  올려다본 하늘이 그랬다. '파리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비는 거짓말처럼 그쳐있었고, 세차게 퍼붓던 빗줄기에 씻겨 내려간 파리는 깨끗하고 맑았다. 그런 파리 위에 떠 있는 구름은 도시의 어떤 광경보다도 화려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의 인상적인 모습들을 보며 루브르 광장 앞에서 사진을 찍던 나는, 비가 그친 김에 가까운 센느강변을 걷기로 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일정의 연속이었고, 뚜렷한 목표 없이 오로지 마음 내키는 곳으로 향하는 하루였다.


목표가 뚜렷한 이동과 방향이 정해진 걸음은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 중의 하나다. 도착해야 할 목적지가 없는 여행은 결코 없다. 우리는  여행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항상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을 향해 전진할 때 비로소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삶에서 목적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부유한다. 그 방황이 목표를 달성한 뒤의 일이라면 그저 잠시 쉬어가는 휴식쯤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목표에 가 닿을 수 없음을 깨닫고 겪는 방황은 고통스럽다.


여행지에서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과정은, 미약하게나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도 닮아있다. 그래서 여행지에서의 목적 없는 이동은 우리를 다소 불안에 빠뜨리곤 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삶의 길에서 조금이나마 빗겨 나고자 떠나는 여행에서까지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이동하고 전진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진다. 흔히 말하는 '여행이 인생의 축소판이자, 인생이 곧 여행'이라면, 인생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여행에서의 목적 없는 방황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가장 안전한 방황이자, 인생에서는 겁이 나서 미처 해볼 수 없었던 작은 일탈이 될 수 있다. 여행지에서 내가 아무런 목적 없이 걷고 방황했던 건 어쩌면, 인생에서 큰 일탈을 저지를 용기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자의 작은 용기이자, 일종의 대리만족이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무작정 마음이 시키는 곳으로 걷는 작은 방황은 모든 구속과 관습,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속박을  벗어던지고 충동과 본능,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낯선 여행지에서의 처음 보는 강변을 산책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효과적 이리라. 그렇게 나는 정해진 방향 없이 한참 동안 센느강을 걸었다.

파리지앵들의 애정 어린 장소이자, 파리를 여행하는 수 많은 여행자들이 바라봤을 센느강. 파리를 여행하는 내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면 나는 항상 센느강으로 향했다. 파리에 있음을 가장 실감할 때는 에펠탑 앞에 있을 때도, 오르세를 구경할 때도 아닌 센느강을 걷고 있을 때였다. 센느강은 내게 곧 파리 그 자체였다.  그곳에선 자유분방한 파리 사람들의 모습도, 예술과 낭만의 도시라 불리는 파리의 단면도 엿볼 수 있었지만 악취 나는 파리와 기승하는 집시들 같은 어두운 면들도 동시에 마주할 수 있었다.


만약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 도시를 흐르는 강가로 무조건 나가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특히 파리뿐 아니라 대도시를 흐르고 있는 강을 따라 걷다 보면, 그 도시에서 보고자 하는 대부분의 명소를 구경하는 행운도 함께 누릴 수 있다.(파리에선 오르세, 노트르담, 에펠탑 등의 랜드마크를 전부 센느강을 걸으며 볼 수 있다.)

센느강의 풍경과, 강을 따라 길게 늘어선 노점상들을 기웃거리던 나는 파리 시청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리 시청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기보단, 근처에 있는 조르주 퐁피두 센터를 가기 위함이었다. 그때까지는 파리의 시청사를 구경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시청하면 으레 떠올려지는 희고 네모난 모양의 밋밋한 전형적인 관공서 건물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파리 시청사는 르네상스와 벨 에포크 시대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르네상스와 벨 에포크 건축양식'. 사실 이렇게 들어선 아무런 감도 오지 않는다. 결국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래된 건물양식-정도로 이해하는 나의 무지함만 다시금 확인할 뿐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었다면, 시청사는 아무 의식 없이 길을 걷던 중에도 다시금 뒤를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수려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생각해보니 서울시청사도 매일같이 아침 출퇴근길에 보지 않았다면 웅장하진 않지만 적어도 화려하다고는 느꼈을 법한 건물이었다. 시청은 그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기에 도시에서 이토록 공을 들여 건축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리 시청사를 보며, 기왕이면 서울 시청사도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 양식으로 지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 시청사의 공통된 점이 있다면 앞에 큰 광장이 있고, 겨울을 맞이해 그 광장을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점 정도였다.


시청을 지날  때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고, 도로는 금세 빨간색 브레이크등을 밝힌 차들로 가득 찼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모습이었다. 한국에서도 무수히 봐왔던 퇴근길의 풍경이었다.

9000km를 넘게 날아온 곳에서(9000km라니 도저히 실감 나지 않는 거리다) 마주한 그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하루 종일 아무런 목적 없이 걷기만 한 나의 하루와 일상의 시간을 살아낸 그들의 하루는 한국과 파리 사이의 거리 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졌다. 일상의 평범함과 비일상의 특별함이 만나는 시간이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어스름의 시간이 내뿜는 특유의 고단함과 편안함의 공기가 내 주변을 금세 가득 채웠고, 나는 모든 도시엔 결국 저마다의 삶이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해가 지고 어둑해진 뒤에야 도착한 조르주 퐁피두 센터는, 익히 들어온 그 특유의 외관 덕에 얼핏 보면 삭막한 공장쯤으로 보였다. 파리에서 현대 예술을 위한 미술관과, 낡은 국립 도서관을 함께 해결하기 위해 지어진 이 공간은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내부의 공간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알고 보니 외관의 파이프와 어지러운 골격들은 건물 내부를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공간 자체를 극대화하기 위한 건축적인 설계였다고 한다. 건물 자체는 볼만했고 한 번쯤 와보는 것도 나름 의미 있었지만, 내부에서 전시하고 있는 전시들을 보기엔 시간도 애매한 데다가 현대 예술은 어쩐지 난해한 기분이 들어, 내부를 하릴없이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마침 저녁엔 파리에서 유학하는 친구들 만날 계획이었기에, 친구에게는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 있겠다고 한 뒤,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걸어 다닌 나를 위한 잠깐의 휴식을 가졌다. 순식간에 나른한 피로가 몰려왔다.

쉬고 있으니, 금세 친구에게서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먼 타지에서 몇 년만에 보는 친구였다. 같은 대학교, 같은 과를 다니면서도 자주 만나거나 했던 친구는 아니었는데(그렇다.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나먼 파리에서 만난 익숙한 사람과의 수다는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혼자 하는 자유로운 여행이 체질이라고 한들, 사람이 고팠고, 한국어로 할 수 있는 대화들이 그리웠다. 좋은 것과 새로운 것들을 보는 것에 피로함을 느꼈던 것일까, 나는 한국에 있는 익숙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우리는 친구가 추천하는 가게에 들어가 이국적 이게도 크레페를 앞에 두고 시드르를 마시며 그동안 못 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한국에서 알고 지낸 친구를 파리에서 다시 만난  그날 밤, 파리는 적당히 아름다웠고 가끔 반짝였다. 한국과 파리. 나는 이 두 곳을 연결해주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선을 느꼈다. 그 선은 모두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에게로 돌아와 끝나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리의 회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