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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Feb 06. 2016

낭만이 여행자의 일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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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여행을 좋아하게 됐을까.

내 최초의 여행은 군 입대전 스물두 살의 여름에 처음 떠났던 일주일간의 내일로 여행이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그 시절, 내 손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두려워했던 나는 일주일의 여행을 위해 부지런히 자료조사를 했다. 그 철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첫 여행은 나를 긴장시켰지만, 대체로 잘 해냈던 것 같다. 아직도 그 당시에 조사했던 자료들과 어설픈 여행기는 싸이월드 한편에 고스란히 기록되어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내가 스마트폰 없이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에 감탄하곤 한다.


군대를 제대하고 2년 뒤, 두 번째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도 역시 내일로 여행이었다. 6개월간의 인턴이 끝난 시기였고, 동시에 7개월간의 짧은 사랑이 끝난 여름이었다. 이 전의 여행이 군입대 전의 뒤숭숭한 마음을 뒤로한 채 무언가를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면 두 번째 내일로 여행은 인생의 중요했던 순간들이 끝난 뒤숭숭한 마음을 버리기 위한 여행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충동적으로 떠났고, 어딘가에 머무르며 마음을 추스르기 보다는 그저 떠나기 위해 시작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떠난 여행은 결국 그리움과 뒤숭숭한 마음을 헤집어 놓아 한 데 뒤섞어 버린 채 끝이났다.

같은 해 12월의 마지막 주, 마음 한편에 남은 찝찝함을 해결하고자 21일간의 유럽여행을 떠났다. 길고도 길었던 대학교의 마지막 학기를 끝냈고(그러나 5학년까지 다닌 건 함정), 이미 한참 전에 끝나버린 사랑에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으며(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에 수없이 마주쳤다. 여러분 CC는 멀리하는 게 낫습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어디로든 떠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긴 시간 동안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난 여행은, 뒤돌아보면 많은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떠나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다. 너무 당연한 소리라 코웃음이 쳐지지만, 인생이 내게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해 답을 찾기 위해, 혹은 회피하기 위해 떠났다. 철저히 혼자가 되어서. 고여있는 생각을 흐르게 하기 위해선 다른 장소와, 색다른 자극들이 필요헀다.


그러나 모든 여행이 좋지는 않았다. 실제로 가 본 여행지는 차라리 집에서 간편하게 컴퓨터를 몇 번 두드려 찾아보는 사진보다 별로인 경우도 있었고, 다수의 여행기에서 묘사하는 것과는 달리 여행은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혼자 떠난 여행은 철저하게 외로웠다. 여행도, 결국은 현실이었다.


이 팸플릿을 만든 사람들은 어두운 직관을 통해, 야자나무, 맑은 하늘, 하얀 해변을 보여주는 노출 과다의 사진들, 지성을 모욕하고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힘을 지닌 이런 사진들에 사람들이 쉽게 현혹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데제셍트는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실제 경험에서는 우리가 보러 간 것이 우리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 때문에 희석되어 버린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中-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말하듯, 여행은 대체로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매우 현실적이다. 여행지에서 꿈꾸던 풍경들을 보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고, 지루하고 뻔한 일상의 요소들은 무자비하게 우리를 덮쳐온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을 목격한 이들은 알 것이다. 여행지에서조차 목격하게 되는 뻔한 일상을 견디면서도 떠나는 이유는, 언젠가는 우리가 기대했던 낭만으로 보답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는 걸.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


어쩌다가 여행을 좋아하게 됐을까.


무책임하지만 잘 모르겠다.


여행의 즐거움을 정의하는 일은 사랑이 무엇이냐고 정의하는 일 만큼이나 힘들다. 그건 적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만 자라온 사람에게 눈 내리는 날 특유의 분위기에 대해 설명하는 일 만큼이나 힘들다. 그래서 나는 떠나 보지 않은 사람들은 단 하루만이라도 기차를 타고 멀리 가보라고 조언한다. 여행이 어째서 즐겁고 또 어째서 고통스러운지는,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그 순간부터 다시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에 서는 그 순간까지의 그 모든 과정을 겪어본 자 만이 이해할 수 있다. 매일같이 기차역으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여행자의 시간만이 주는 다른 분위기에 사로잡히면, 기차역이라는 일상의 공간이 특별함으로 변하는 마법을 겪게 될 것이다.


나는 흔히 말하는 여행의 고수는 아니다. 겨우 몇 번의 여행을 다녀왔을 뿐이고, 이제 막 여행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초보 여행자다. 여행에 대해 쉽게 정의 내리지 못하는 건 어쩌면 경험이 부족하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여행에 초보와 고수가 어디 있을까. 무수히 많은 여행을 떠난 이들도 여행에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비슷하지 않을까(아마도).


그렇기에 여행을 처음 떠날 때의 고민의 순간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사람으로서 감히 조언해보자면, 고민할 시간에 일단 떠나라. 여행은 당신이 예측할 수 없는 모든 것들과 당신의 충동적인 행위가 용인되는 인생에서 몇 안 되는 행위다. 그리고 당신이 고민하는 시간에 여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든다. 충동적으로 끊어버린 여행 티켓은 당신을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것이고, 분명 여행에 대한 (내가 설명하지 못한) 당신만의 철학이 생겨날 것이다. 여행을 다녀오면 위스망스의 데제생트처럼 다시는 여행을 떠나지 않을 수도 있고, 나처럼 여행에 중독되어 미친 듯이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브런치에 내가 쓰고 있는 글들이 당신의 여행에 조금이나마 불을 붙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2월 7일부터 14일까지, 또 한번의 여행을 떠납니다. 이번엔 프라하-할슈타트-빈-잘츠부르크 입니다. 그동안엔 글을 올리기 힘들 것 같아 대신 지금까지 쓰고 있던 여행기의 중간점검 정도의 느낌으로 글을 한편 올리고 갑니다. 여력이 된다면 여행지에서도 사진과 간단한 글 정도를 쓰겠지만, 여행지에서 가급적이면 구글 지도를 보는 일 외엔 인터넷을 잘 쓰지 않는 관계로, 확답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분에 넘치게 많은 분들이 글을 읽어 주고 계셔서 항상 감사합니다(브런치 메인, 혹은 다음이나 카카오 채널에 올려주시는 많은 관계자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표현은 못하지만, 그런 분들 덕분에 더욱더 채찍질하고 머리를  쥐어짜 내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마도 동유럽을 다녀온 이후의 여행기도 지금 쓰는 글을 끝내는 대로, 혹은 쓰면서 같이 쓰게 될 것 같습니다. 공항은 늦은 밤이라 그런지 조용하네요. 그럼,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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