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욱 Feb 16. 2016

여행의 모순

일주일의 짧은 여행이 끝났다. 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언제나처럼 내 편이 아니었고, 발이 부르트도록 걸었으나 아쉬움은 걸어간 발자국의 수 만큼 커져갔다.


여행은 늘 모순적이다. 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시간은 늘 한정적이다. 그 정해진 시간 동안 우리는 두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두 눈을 열심히 돌려가며 하고 싶었던 일들과 보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지워내려 간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여유로운 여행을 꿈꾼다.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이탈리아의 어느 해변에서 한 없이 누워있는 여행을. 그러나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여행은 없다. 시간이 아주 많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 우리에게 주어지는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길지 않다. 그래서 여행은, 모순적이다.


이번 여행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부지런히 걸었고, 그만큼 내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도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비엔나의 골목을 부지런히 걷던 나는 불현듯, 하나의 감정이 머릿속에 떠오름을 느꼈다. 그건 믿을 수 없게도 권태로움이었다. 나는 비엔나의 어느 거리에서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왜 나는 저들처럼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 시간을 죽이지 못하고 있는가? 나는 왜 이렇게 발이 부르트도록 걸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 걸까? 온갖 질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즐기지 못하는 나 자신이 못내 아쉬웠고, 여유를 즐길 시간과 돈과 모든 자원을 허락하지 않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건 곧 내가 놓인 상황에 대한 환멸과 권태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감정을 느낀 순간 나는, 혼자 있는 나를 견딜 수 없었다. 권태는 곧 외로움으로 발전했다.



프라하는 아름다웠다. 유난히 사랑하는 연인들이 많이 보인 도시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프라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도시였으니까. 사랑하고 있지 않은 내가 죄를 짓는 것만 같은 도시였다.  그곳에서 나 역시 '아무나 붙잡고 함께 야경을 보며 맛있는 프라하의 흑맥주를 마시자고 할까' 하고 수 없이 생각했다. 그러나 용기 없는 나는 화약탑 위에서 해지는 프라하를 기다리며 셔터만 눌러댔다. 쌓여가는 사진의 수만큼 나는 춥고 고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하의 야경은 그 모든 걸 감내할 만큼 멋졌다. 프라하 성을 배경으로 애정행각을 서슴지 않던 연인들도, 용서할 수 있었다. 그림 같은 장면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야경을 보기 위해 까를교로 향하고, 화약탑을 찾아가고, 시계탑에 올라갔다. 무수히 많은 계단을 오르고 돌길을 걸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무리해서 걷고 나면 매일 저녁 녹초가 되어 숙소로 기어들어오다시피 했다. 그래도 만족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도시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프라하'에 있었으니까. '프라하'. 그건 내게 마법의 단어와도 같았다. 수술 뒤 고통을 완화해주기 위해 맞는 모르핀처럼.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는 고요했다. 해가 지면 어둠이 호수를 껴안았고, 적막이 마을을 덮었다. 평화로운 곳이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던 나는 계속 걸었다. 할 일이 없으면 없는 대로 보냈어도 될 텐데,  안절부절못하지 못하고 나는 걸었다. 할슈타트의 밤과 아침을 걸으며, 이 곳에서 무리하게 하루 머물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해가 뜰 무렵의 아침,  물안개 낀 할슈타트는 이 세상의 도시가 아니었다. 새하얗게 안개가 낀 저 산의 골짜기로 배를 타고 들어가면, 판타지 영화에서나 봤던 엘프의 도시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신비로운 동시에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런 할슈타트에 서서히 눈발이 날렸다. 내리던 눈은 점점 거세져 어느덧 마을을 외부의 풍경과 단절시켰다. 눈 내리는 할슈타트를 보며 나는 세상의 끝이 이런 풍경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건 응당 세상의 끝에나 어울릴법한 풍경이었다. 거센 눈발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자비하게 지워내고 있었다. 설국(雪國)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선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를 따라다니는 여정을 선택했다. 그러다가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에서 뜻하지 않게 두 번째로 새하얀 눈을 마주했다. 이번에 만난 눈은 한층 따뜻해 보였다. 환하게 빛나던 햇살과 하얗게 부서지던 새하얀 눈 밭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로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눈앞의 풍경을 보고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두 눈으로 보고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지 못하고 있음을 눈치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풍경은 아름다웠으나, 내 눈에 들어온 풍경은 없었다.

이번 여행을 시작하게 된 가장 결정적 계기였던 비엔나에 도착했다. 비포 시리즈의 제시와 셀린느가 사랑을 시작한 도시에서 나는 그들과 달리 우아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그들의 여정을 쫓는 길은 녹록지 않았고, 도시는 내가 걸어간 발자국 만큼 멀어져 있었다. 사진은 남았지만 내겐 무엇이 남았을까. 촬영을 다 마친 비엔나에서의 마지막 밤, 나는 혼자 고민했다. 여행은 즐겁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회의감을 남겼다. 여행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었다.

나는 느긋하게 거리를 걸으며 조금 더 그 나라와 도시의 모습을 온몸으로 느끼는 여행을 바랐다. 그러나 시간은 내 욕심을 채우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다. 그걸 깨닫지 못한 나는 어리석게 발버둥 쳤는지도 모른다.


영화 촬영지로 향하기 위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던 순간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어깨에 메고 있는 무거운 카메라와, 점점 더 아파오는 무릎과,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밥도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한 허기진 배까지. 어쩌면 나는 두 눈이 아니라 카메라로 이 도시를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물론 여행은 행복했다. 기억에 남을만한 순간들도 있었고, 사진을 찍으러 떠난 여행에서 맘에 드는 사진들을 건졌으니 그것만으로도 일정 부분은 만족스럽다. 그러나 다음번 여행은 좋은 사람들과 좋은 곳에서, 외롭지 않은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나는 그 질문에 답을 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오히려 나를 더 복잡하게 헤집어놓았다. 나는 아직 여행의 목적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체코 오스트리아를 7일간 다녀왔습니다. 갈 땐 마냥 좋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더 복잡해져서 돌아온 것 같습니다. 글을 너무 회의적으로 쓴 듯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대체로 만족스러웠습니다.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다녀온 뒤의 여행기와 사진은 천천히 올릴 예정입니다. 그동안에 파리-이탈리아 여행기의 마무리도 지어야겠지요. 써야 하는 글은 쌓여만 가는데, 글을 쓴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훨씬 고통스러운 작업이더군요.


그럼  다음번 글에서 찾아뵙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낭만이 여행자의 일이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