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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Apr 16. 2016

입속에서 프-라-하를
가만히 굴려보면

(2016.02.07 in Czech Republic, Prague)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발음했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단어가 있다. 은하수, 솜사탕, 방울이나 하몽 같은 단어들. 힘주어 발음하지 않아도 되는 단어들. 입술 사이로 새어나가는 바람과 함께 깃털같이 날아갈 것만 같은 단어들. 프라하 역시 그런 단어였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였지만, 프라하의 발음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입안에서 '프라하'라는 단어를 가만히 굴리고 있으면, 어디선가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이 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프라하 행을 결정했다. 부드러운 발음의 이 도시에 가면 아름다운 것만 보고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역사적인 사건에 '프라하의 봄'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이는 도시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밤을 날아 도착한 프라하의 날씨는 우중충했다. 태양은 회색빛의 하늘 뒤로 숨어있었고 도시는 을씨년스러웠다. 사진으로만 봐오던 프라하의 낭만적이고 고풍스러운 중세 풍경은 결국, 이 도시가 오래된 건축물들로 구성되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의 오래된 건축물들은 회색의 날씨와 어우러져 조금은 으스스해 보이기까지 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잠깐의 휴식을 가진 뒤 밖으로 나섰다. 장시간의 비행에 지친 몸을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침대에 누워 시간을 흘려보내기엔 짧은 여행기간이 못내 맘에 걸렸다. 대부분의 여행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길든 짧든 여행에서 원하는 것들을 보고 느끼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은 우리는 여행지에서만큼은 시간을 미세하게 쪼개고 쪼개 사용한다. 일상에서였다면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을 상황에서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프라하의 시내 속으로 들어간 내가 그랬듯이.

숙소에서 나온 나는 천천히 프라하 성을 향해 걸었다. 이내 블타바 강 너머로 성 비투스 대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이 도시에 대해 창피하리만큼 무지했다. 숙소를 나온 내가 갈 곳은 뻔했다. 프라하성 지역과 전 세계의 연인들이 찾아와 사랑을 속삭인다는 까를교, 그리고 근처에 위치한 말라스트라나 지역만이 내 머릿속에 떠오른 목적지였다. 여행을 오기 전에 만난 후배가 추천해준 체코의 국민작가 얀 네루다의 '말라스트라나 이야기'를 읽지 않았다면, 말라스트라나 마저도 낯선 이름이었을 테다.


어느 한 도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고 하는 여행과 모르고 하는 여행의 차이는 컸다. 일정표를 시간 단위, 분 단위로 세밀하게 쪼개지 않고 돌아다니는 두루뭉술한 여행을 선호한다는 이유로 나는 프라하에 너무나도 무지한 상태로 도착했다. 그러나 그건 계획과 무계획의 영역이 아닌, 한 나라와 한 도시를 여행하기 위한 기본적인 예의의 차원이었다. 여행에서 지식은 결국 흥미와 직결되는 요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무지를 이겨내고 두리번거리며 프라하 시내를 누빌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그곳이 낯선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조건 많이 보고, 관찰하고 직접 부딪혀보는 방법을 택했다. 게다가 기술의 발전은 우리에게 스마트폰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나는 프라하를 돌아다니면서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언제든지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었다.


프라하 성으로 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마주친 까를교는 1357년 신성로마 황제였던 카렐(까를)4세의 명으로 착공되어 1402년에 완공되었다. 이 다리는 이후 460여 년간 블타바 강을 건너 구 시가지 광장과 프라하 성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다리였다.

까를교의 양 옆으로는 성 요한 네포무크, 성 비투스 등 체코의 유명한 성인 30인의 조각이 놓여 있어 단조로울 수 있는 다리 풍경에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그러나 현재 다리 위에 있는 조각들은 모두 모조품이고, 원작들은 라피다리움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면서 보인 이 30개의 조각상들 중에 한 눈에도 가장 인기가 많아 보이는 동상이 눈에 띄었다. '성 얀 네포무크'의 동상이었다.


이 네포무크 신부의 동상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바츨라프 왕의 두 번째 부인인 소피 왕비는 왕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 한 장군과 사랑에 빠졌다. 왕비는 자신의 죄를 당시 자신의 고해 신부였던 네포무크 신부에게 고백하지만, 왕비의 비밀을 알게 된 왕은 크게 분노하며 네포무크 신부에게 왕비의 고해 내용을 말하라고 추궁했다. 그러나 네포무크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고해성사 내용은 밝힐 수 없다며 거부했고, 왕은 '나에게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알려줄 수 없다면 한 생명에게라도 말하라'는 제안을 한다. 네포무크는 마침 왕의 옆에 있던 개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고(대단한 강심장이 아닐 수 없다), 왕은 분노해서 온갖 고문 끝에 네포무크의 혀를 잘라 강물로 던져버렸다.

네포무크에 대한 전설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블타바 강에 던져진 그의 몸이 강물에 닿자마자 5개의 별이 그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고 한다. 네포무크의 동상이 머리 위에 별이 다섯 개 떠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이유다. 후에 네포무크의 동상이 까를교 위에 세워졌는데, 신기하게도 그의 동상 앞에서 소원을 빈 사람들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퍼지며 까를교에서 가장 유명한 동상이 되었다.


재밌는 것은, 동상의 밑 부분에는 바츨라프 4세가 문제의 개를 쓰다듬는 장면과 네포무크 성인이 강물로 던져지는 장면이 묘사된 부분만 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눈에 봐도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탄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물로 던져지는 네포무크의 입 부분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개에게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애인이나 배우자가 평생 자신에게 헌신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동상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저마다의 소원을 빌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다리 위로 펼쳐지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까를교에 낭만을 더해주고 있었다. 때로 어떤 풍경이 더 매력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흥미로운 이야기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다는 걸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까를교 위에는 서른 개의 동상과 전 세계에서 찾아온 여행객들이 어우러져 수많은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까를교의 양 끝에는 높은 탑이 있어서 올라가면 오렌지색의 지붕 뒤로 펼쳐지는 다리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땐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했던 탑이었는데,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크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탑의 꼭대기에서 올라 탁 트인 프라하 시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제야 프라하에 왔다는 실감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자그마한 오렌지색의 지붕들은 회색빛 프라하의 겨울 풍경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탑에서 내려와 프라하 성으로 들어오자, 눈앞에 완벽하게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울퉁불퉁한 돌로 이루어져 걷기 불편한 도로와 직사각형의 창문이 늘어선 높지 않은 집들, 저 멀리 보이는 뾰족한 돔 모양의 탑까지. 프라하 성은 중세시대로 돌아가 어느 한 골목을 걷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이국적인 풍경의 정점이기도 했다. 프라하가 왜 연인들이 찾는 낭만의 도시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프라하는 일반적인 도시의 빌딩 숲과는 완벽하게 다른 세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동화같은 풍경, 영화같은 도시였다.

처음 프라하에 도착해 느꼈던 회색의 날씨는 이런 색다른 풍경에 특별함을 더해줬다. 파랗고 높은 하늘과, 그림 같은 구름 조각들, 푸른 나무들이 있었다면 아마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프라하에 몰입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마 파란 하늘에 감탄하고, 녹색의 나무들에 마음을 빼앗겼을 수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건물 지붕의 오렌지빛과,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무채색인 이 프라하의 겨울은 내가 이 도시에 온 마음을 쏟기에는 최적의 계절이었다.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던 프라하의 모습이, 사실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일 뿐이었다는 걸 프라하에 적응하기 시작한 그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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