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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Mar 20. 2016

야간 비행

(2016.02.07 Incheon to Prague)

늦은 밤, 어둠이 내린 인천공항엔 야간비행을 기다리는 사람들 몇 명만 서성거릴 뿐이었다. 나 역시 그중의 하나였다.

처음으로 타는 밤 비행기였다. 2월 7일 00시 30분, 그러니까 2월 6일 밤에 떠나는 여행이었다. 목적지는 체코의 도시 프라하였다.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의 촬영지', '연인들이 신혼여행으로 오고 싶어 하는 도시' 등, 출발하기 전 접한 그곳은 연인들과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가득한 도시였다.


프라하로 출발하는 날은 긴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당연히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밤의 공항은 고요했다. 시끌벅적한 단체 관광객들도, 환하게 불을 밝힌 상점들도 없었다. 시간이 늦은 덕분에 여행자 보험도, 핸드폰 로밍을 할 서비스 센터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비행기가 뜬다면 당연히 가게도 서비스센터도 문을 열었으리라 생각했던 내 실수였다.


부랴부랴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으로 여행에 필요한 일들을 처리했다. 다행히 탑승수속은 늦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출국장을 통과해 게이트에 도착하니, 나를 태우고 긴 밤을 날아갈 KLM의 비행기가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였다.

야간비행은 은밀하고 조용했다. 기내는 조용했고,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먼 곳으로의 기나긴 비행을 앞둔 사람들의 자그마한 흥분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들과 나는 좁은 비행기 속에서 함께 열 몇 시간을 비행한 뒤 암스테르담의 공항에서 각자의 아침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야간비행이라는 단어에는 묘한 마력이 있다. 이미 존재만으로도 설레는 비행이라는 단어 앞에 '야간'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그날의 비행은 더더욱 특별해진다. 평범하지 않은 그 단어는 그야말로 해서는 안 되는 일, 비행(非行)과도 같은 느낌마저 들곤 한다.


'기장은 얼마나 피곤할까?', '승무원들은 야간비행 내내 잠을 자지 않는 걸까?'하며 온갖 생각에 잠겨 있는데, 기내의 모든 불이 꺼졌다. 사람들은 까마득히 높은 30000피트 상공의 금속 덩어리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불 꺼진 기내에선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창밖으로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만이 펼쳐져 있었다. 이내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창밖의 풍경이 아까와는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별이었다. 창밖으로 수많은 별이 어지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언젠가 어릴 적 보았던 가평의 밤하늘이 생각났다. 그날의 밤하늘에도 빼곡하게 별이 박혀 있었다. 기내에선 웅웅-거리는 비행기 엔진의 소음만이 빈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깨어있는 듯 잠든 시간들이 지나갔다. 그렇게 영화 한편을 보고, 선 잠에 들었다 깼다를 반복했지만 여전히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반짝이는 별을 보고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창 밖에는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 뒤로, 녹색의 안개 같은 것이 펼쳐져 있었다. 안개는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오로라였다.


나는 급히 카메라를 켜고 사진을 찍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혹시나 싶어 앞좌석에 붙어 있는 모니터를 확인해봤다. 화면에선 내가 탄 비행기가 러시아 위를 날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극지방에서만 볼 수 있다는 오로라임에 틀림없었다. 언젠가 꼭 보고 싶었던 오로라와 이런 식으로 첫 대면을 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오로라는 우아하고 부드러웠으며 신비로웠다. 마치 우주 속을 비행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히 우주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우주란 마치 공기와도 같아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는 생각할 수 있어도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살아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날, 내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오로라를 목격했던 그 순간 비행기는 광활한 우주의 어느 푸른 행성을 날고 있었다. 행성의 이름은 지구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작은 흥분으로 들뜬 나는 한참 동안 창문을 쳐다보다 잠이 들었다. 어느덧 켜진 눈부신 조명에 잠에서 깨니, 어느덧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까지는 한 시간 남짓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새벽 이른 시간, 비행기는 스히폴 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공항은 조용했다. 아침의 분주함이 아닌, 그 분주함을 맞기 위한 새벽의 고요함이 공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스히폴 공항은 내겐 처음 겪어보는 경유지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암스테르담엔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아무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무료하게 공항을 돌아다녔다. 공항은 새벽이라기보단 차라리 밤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전날 떠나온 밤의 시간이 뚝 떨어져 나와 그대로 나와 함께 도착한 느낌이었다. 마치 밤이 나를 계속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손목시계의 용두를 돌려 프라하의 시간에 맞췄다. 시간의 빈 공간을 그렇게라도 채워야 할 것만 같았다.

암스테르담의 아침을 날아 프라하로 향하는 비행기 안, 비로소 아침이 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창 밖에선 새벽의 어스름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긴 시간을 날든 짧은 시간을 날든, 비행기는 항상 창가석에 앉는 것이 옳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프라하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오전 여덟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하루가 시작한 지도 한참이 지났을 시각이었지만, 열 몇 시간을 날아온 프라하에서의 하루는 이제야 시작되고 있었다. 마치 하루가 더 주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나는 이번 여행이 어떻게 흘러갈지 가늠해보고 있었다. 프라하의 첫인상은 고요했다. 그리고 프라하의 고요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발견한 한국어 간판은, 내게 이 곳이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다녀가는 곳인지를 다시금 보여주고 있었다.


여행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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