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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Dec 25. 2016

엄마는 유럽의 종달새였다

엄마의 졸업여행, 아들의 퇴사여행

나는 지금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다. 한국은 이미 성탄의 밤이겠지만, 여기는 아직 크리스마스가 오지 않은 24일 저녁이다.

12월 15일부터 아일랜드 더블린을 시작으로 나의 세 번째 유럽여행을 시작했다. 더블린, 파리, 그리고 바르셀로나를 거쳐 그라나다, 세비야, 마드리드로 이어지는 여정. 1년 5개월가량을 다닌 회사에 지난 11월 퇴사 의사를 밝혔고, 12월 2일의 마지막 출근을 끝으로 나는 그곳에서 나왔다. 퇴사를 했다고 여행을 떠나는 건 어쩐지 촌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다 보니 퇴사여행으로 이름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은 여행이 되었다.

엄마는 올 2월을 끝으로 지난 4년간의 방송통신대학 과정을 끝마친다. 역시 의도치 않았으나 이번 유럽여행은 엄마의 졸업여행이 되어버렸다. 시기를 맞추다 보니 12월 중순에서 1월 초가 되었고, 나는 15일부터, 엄마는 19일부터 여행을 시작했다.

더블린에서 먼저 여행을 시작한 나는 이번 여행에서도 영화의 촬영지를 쫓아 거리를 헤맸다. 지금껏 가장 보고 싶었던 원스의 장소들이었다. 더불어 같은 감독의 영화 싱스트리트의 촬영지도 마주했다. 이번 여행을 위해 두 영화를 다시 봤다. 그중 특히 영화 원스는 여전히 내 마음에 가장 큰 울림을 주는 영화였다. 극중에선 이름도 나오지 않는 남자와 여자 두 주인공들이 서로 교감하는 거리 위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건 큰 즐거움이었다. 익명의 그들은 10년 가량이 지난 지금도 그 거리에 또렷이 새겨져있는 듯 했다. 내게 더블린은 영화 원스를 닮은 도시였다.


더블린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엄마를 파리에서 만났다. 마침 더블린에서 파리로 오는 비행기는 서울에서 오는 비행기와 같은 터미널에 내렸다. 나는 엄마를 그곳에서 기다렸다. 두 시간 가량이 지나 엄마가 수하물을 찾는 곳으로 왔고,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지금까지 내가 찍어온 사진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진이었다고 생각한다.

파리에서 엄마는 옆에서 쉼 없이 재잘댔다. 때로는 유럽의 역사를, 때로는 미술사를, 때로는 좋아하는 영화들을 일일이 나열해가며 소녀처럼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건 우리가 쉽게 잊곤 하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엄마가 엄마이기 전에, 꿈 많은 소녀였으며 호기심 많은 학생이었다는 그 잊기 쉬운 사실. 엄마는 유럽의 종달새였다.

이 모든 여행의 목적은 결국 가우디였다. 엄마와 나의 스페인행, 바르셀로나행은 순전히 엄마의 '가우디 사랑'때문이었다. 엄마는 죽기 전에 가우디를 꼭 보고 싶다고 자주 말씀하셨고, 그래서 이번 여행의 여정엔 무조건 가우디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있는 바르셀로나가 들어가야 했다.

드디어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들어섰을 때,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셨다.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엄마에게 그런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이번 여행은 참 목적이 많은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우디의 구엘공원과, 까사 밀라, 까사 바트요, 그리고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그야말로 말이 나오지 않는 작품들이었다. 특히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선 무의미하게 셔터를 눌러댔으나 정작 어떤 것도 찍지 못했다. 이틀을 그곳에 방문했지만 나는 그 장소에 대해 10%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아마 긴 시간을 들여도 이 곳에 대해 완전히 깨닫기는 힘들지 않을까.

우리 두 모자의 여행은 아직 10일가량이 더 남았다. 그라나다와 세비야, 마드리드를 거치는 여정이다. 엄마와의 유럽여행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걸 깨달았으나, 그건 그것대로 또 즐거움이었다. 일평생 나의 보호자였던 엄마는 유럽에서 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유럽에서 엄마의 보호자는 나였다.


유럽의 크리스마스는 모두가 알다시피 조용하다. 우리 역시 오늘과 내일은 가까운 곳들을 둘러보곤 숙소에서 쉴 예정이다. 오늘의 저녁은 보케리아 시장에서 오늘 사온 새우와 각종 음식들로 푸짐한 상차림을 차렸다. 나름의 조촐한 크리스마스이브 파티인 셈이다.

아마 이 여행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엄마와의 여행 이야기를 이 곳에 글로 풀어내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을 보는 모든 분들이, 즐거운 성탄과 연말이 되기를.


https://www.instagram.com/jw_yoon_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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