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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Feb 22. 2017

한 문장으로 딱 떨어지는 사람

나는 단 한 번도 내 삶이 멋있다거나, 부러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누군가가 나를 부러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모순이었다. 자신을 자랑스럽게 내놓지 못하는 사람의 삶을 부러워하다니. 그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인가 꿈을 '회사원'이라고 적어 낸 적이 있었다. 나는 평범한 회사원을 꿈꿨다. 평범해지고 싶었고, 구두를 신고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직장인이고 싶었다. 그건 어쩌면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서 용돈을 받았다는 친구들이 부러워서 생겨난 무의식의 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 어디 후배들 앞에서 멋있게 '저는 현재 00 기업 전략기획실에서 일하고 있는 정욱입니다'라는 명쾌하고도 멋들어진 한 문장으로 나를 설명할 수도, 근사한 정장을 빼입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근사한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도 없다. 깔깔이를 입고 느지막이 일어나 12시에 아침을 먹고 글을 쓰다가 담배를 피우고, 카일루아 팀원들과 회의를 하거나 컨텐츠에 대해 고민하다가 저녁을 먹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저는 사진을 찍고 글을 씁니다. 작가..라고 불리긴 하는데 작가는 좀 낯간지럽네요.'라는 구질구질한 자기소개라니.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스타트업을 다닌다는 건 그런 거다. 우수에 젖은 눈도, 어딘지 고뇌에 가득 찬 표정도 없다. 물론 열정을 쏟을 때도 있지만 한국사회의 일반적 기준에서(물론 이제는 일반적 기준에 나를 맞추고 싶진 않지만) 그리 폼나는 모습은 아님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본인을 설명하기 위해서 끝없이 자신을 소진해야 한다. 소진하고도 또 소진했을 때, 그제야 5% 정도 나를 설명할 자신이 생겨난다. 그런데 나는 남은 95%가 언제쯤 채워질지, 과연 채워지기는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종종 내 삶이 부럽다는 이들에게 말하곤 했다. 재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당신이 훨씬 멋있는 삶을 산다고 느낀다고. 그건 진심이었다. 여전히 나는 나를 부러워한다는 그 행위가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거나 여유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건, 나를 한 단어로 설명하는 일이다. "저 삼성 다녀요. 저 현대 다녀요"가 주는 어떤 아이덴티티. 일전에 친한 선배와 얘기했을 때, 타이틀이라는 건 대기업이 주는 가장 큰 사원 복지와도 같다는 소리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이 사회에서 쉽게 형성해낼 수 있는 정체성일지도 모른다. 타이틀, 혹은 인지도. 간판은 사람을 쉽게 정의 내릴 수 있게 한다. 친척들 앞에서 나를 설명하기 위해 진땀을 흘릴 필요도, 친구들 앞에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해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야 멋지다'(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한잔해)라는 추상적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 "저 삼성 다녀요"얼마나 명쾌한 답변인가.


그 밖에도 안정적인 삶이랄지.. 등등 포기해야 할 것들은 많다. 이게 말은 쉬운데,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주변에서 많이 봤고, 내가 겪어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것도 결국은 무엇이 더 본인의 성향에 잘 맞는지의 차이겠지만 말이다.(개인적으로 나는 후회해 본 적이 없기는 하다)


사람은 문장이 아닌 산문으로 표현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한 단어, 혹은 문장으로 똑-하고 떨어지는 나를 갖고 싶을 때가 있다. 가끔은 산문이 되지 못하는 모호한 문장들로 자꾸 내가 표현되고 있는 듯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가끔 로버트 프로스트의 저 유명한 시처럼, 가지 않은 길을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https://www.instagram.com/jw_yoon_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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