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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Feb 07. 2017

그곳의 겨울은 흥건했다

(2016.02.10 in Austria, Hallstatt)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핸드폰에는 06:01이라는 시간이 찍혀있었다.


해가 진 할슈타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뿐이었다(그 흔한 슈퍼도 보이지 않아 맥주 한잔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전날 밤 일찍 잠에 들었고, 그래서 평소보다 이른 기상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힘들지 않았다. 나는 새벽의 어스름에 잠긴 할슈타트의 모습을 보기 위해 간단히 나갈 채비를 마치고 방을 나섰다.


이른 새벽의 할슈타트엔 인적이 드물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건 오직 내 발소리뿐이었다. 나를 둘러싼 공기는 온통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마을 입구 쪽에서 미리 봐 두었던 장소에 자리를 잡고 푸른빛에 둘러싸여 있는 마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신비롭다는 말로는 차마 다 표현되지 않을 만큼 낯선 풍경이었다.

고요함이나 평화로움, 차분함 따위의 식상한 언어들로는 묘사할 수 없을 만큼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세상과는 단절된 어떤 유토피아적인 곳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안개가 얕게 깔린 할슈타트는 더 이상 이 세상의 도시가 아니었다. 푸른 안개가 낀 저 산의 골짜기로 배를 타고 들어가면, 판타지 영화에서나 봤던 요정들의 도시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이 곳에서 한 달 정도를 머무르며 매일 아침 이 경이로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면, 세상에 고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믿음조차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 아름다운 장면 속에 놓여 그저 한 없이 감탄만 내뱉는 나 자신이 무기력할 정도였다. 내가 무기력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아침의 신비로운 푸른빛은 점차 사라지고 해가 조금씩 뜨기 시작했다. 마을은 조금씩 본연의 색으로 물들었다.

날이 밝은 할슈타트엔 숨 막히는 적막이나 비현실적 신비로움은 사라졌지만, 대신 그 자리에 아기자기하고 작은 시골 마을의 사랑스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왜 이곳을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마을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무로 지어진 갈색의 집들엔 검은색의 삼각 지붕들이 덮여 있었고, 그 집들은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듯이 층을 이루고 겹겹이 자리 잡고 있었다. 뒤로는 알프스의 설산이 배경으로 펼쳐지고, 눈 앞엔 호수가 펼쳐지는 곳. 온통 자연으로 뒤덮인 장소에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듯이 자리 잡은 작은 마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국적인 정취에 취하는 곳이었다.

이른 아침 시작한 산책이 끝나고, 호텔로 들어와 조식을 먹고 있으니 어느덧 창밖에 하얀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눈 덮인 설산, 드넓은 호수, 그곳에 자리 잡은 동화 같은 마을과 그 위에 내리는 하얀 눈.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이런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다시금 이 곳에서 하루를 머무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식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 내리는 눈은 더 굵어져 있었다. 눈 내리는 할슈타트의 모습은 어릴 적 막연하게 생각했던 산타가 사는 마을을 현실로 옮겨놓은 듯했다. 집 앞엔 통나무가 쌓여있고, 그 위로는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집 안에서는 커다란 벽난로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나무가 타고 있는 풍경.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핫초코를 마시며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작은 꼬마. 할슈타트에서 눈을 맞는 순간, 나는 어릴 적 동경했던 장면 속의 작은 꼬마가 되어있었다.

할슈타트에 내리는 눈은 세상의 모든 흔적을 지워낼 듯했다. 마을엔 인적이 드물었고, 그곳에선 소리마저 눈에 덮였다. 세상엔 오직 나와,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눈만이 존재했다. 먼 곳에 시선을 두어도 보이는 것은 오직 하얀 눈뿐이었다. 검은 머리 위와 남색 코트의 어깨 위엔 금세 하얗게 눈이 쌓였다.


그렇게 내린 눈에 파묻혀 거의 눈사람이 될 때쯤이 되어서야 마을을 천천히 걸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서 눈 내리는 마을을 보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 밖에서 눈을 맞으며 바라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밖에서 강한 바람에 쓸리듯 내리던 차가운 눈과는 달리 방 안에서 보는 눈은 그저 소리 없이, 아주 천천히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눈 내리는 날씨를 처음 본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날의 풍경은 볼 때마다 생경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발은 점점 더 굵어졌다. 눈은 그렇게 눈 앞의 시야를 하얗게 지워냈다. 함박눈이었다. 온통 하얗게 뒤덮인 세상의 채도는 낮았고, 웅장하게 솟아 있던 산줄기는 낮은 채도 속에 가려져 흐릿한 실루엣만 남았다. 시야가 좁아지니, 마을의 끝에 서서 호수를 바라봐도 호수의 건너편은 보이지 않았다. 온 지구가 물에 잠긴 뒤 종말의 끝에 남겨진 마지막 마을 같았다. 그렇게 눈은 마을을 외부의 풍경과 단절시켰다.


속수무책으로 내리는 눈 앞에, 눈 앞에 보이는 사물들은 경계가 희미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그곳은, 이름 그대로 설국이었다. 그리고 세상의 끝에 가장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나는 그 순간, 세상의 끝이 이런 풍경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거센 눈발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자비하게 지워내고 있었다. 내리는 눈에선 겨울의 냄새가 났다. 할슈타트의 겨울은 흥건했다. 그것은 때로는 따스하게, 때로는 차갑게 내리던 눈의 냄새였다.

그 뒤로도 마을을 한참 더 구경하던 나는 기차 시간이 다 되어서야 꾸역꾸역 배를 타고 마을 밖으로 나갔다. 기차역과 마을 사이를 오가는 배는 스무 명 남짓이 겨우 탈 수 있을 만큼 작았다. 마을에서 나가는 배에는 오직 나 만이 탑승해있었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배는 작게 요동치며 호수를 건넜다. 아쉬운 할슈타트의 풍경이 김이 서린 창문 밖으로 어렴풋이 보였다. 점점 멀어져 가는 마을의 모습을 보며 그제야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할슈타트에서, 시간은 마치 몽환적인 꿈속을 느리게 헤매는 듯이 흘러갔다. 그것은 때로 내 존재조차 망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호수 건너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겨우 호수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달랐다. 내가 건너온 호수를 돌아보니 저 멀리 조그맣게 할슈타트가 보였다. 안개인지 눈인지 모를 희뿌연 기운에 휩싸인 마을은 판타지 소설에나 나오는 신비의 도시처럼 보였다. 특별한 주문을 외우고, 들어가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어떤 숨겨진 마을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저곳엔 아마 지금도 세상을 지워낼 듯이 하얀 눈이 내리고 있겠지-하는 생각을 하며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 시간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할슈타트 구경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라면 응당 이래야 한다는 듯이,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상기되어있었다. 이윽고 기차가 도착했다. 기차엔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로 가는 여행자들과 생활자들이 한 데 뒤섞여있었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산맥과, 그 위에 하얗게 쌓인 눈을 보며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펼쳐질 앞으로의 여행을 상상했다. 차가운 바깥공기 때문에 창문은 차가웠고, 나는 그 차가운 창문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하루는 아직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이른 기상 탓에 느낌은 벌써 하루가 끝난 듯했다. 그렇게 노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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