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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Feb 17. 2017

길고 지루한 직선 위의, 짧은 환희

여행은 길고 지루한 직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왜 혼자 여행을 떠나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면, 혼자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나를 안도시킨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이 세계에 있지만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 같은, 그 말장난 같은 묘한 모순이 나를 안도시킨다고. 이 세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힘을 주는 것이 혼자 하는 여행이라고. 나는 홀로 여행을 하면서 투명해지고, 점점 사라진다고. 그렇게 말했다.


혼자 여행을 할 때면 이 세계의 것이지만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공기와 촉감과 냄새들이 나를 둘러쌌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를 점점 투명하게 만들고, 끝내는 사라지게 만들었다. 나는 여행의 길 위에서만 오롯이 혼자일 수 있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철저한 이방인이 되는 일이, 투명해지고 사라져버려서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그 묘한 기분이, 때로는 나를 안도시켰다.

그 감정들은 혼자 여행을 하며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었다. 처음으로 혼자 여행했던 스물두 살의 내일로 여행과, 연인과 헤어지고 떠난 두 번째 내일로 여행과, 크고 작은 국내 여행들, 그리고 몇 차례의 유럽여행들까지. 사실 장소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혼자 있기 위해 떠났다. 여행의 길 위에서 혼자 서 있는 내 모습이, 철저하게 외로워질 수 있는 그 모습이 좋았다.


여행을 떠나는 모든 이들의 목적은 저마다 다르지만, 우리가 떠나는 궁극적인 목적은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다면 떠날 이유가 없다.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부터가 이미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도피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사람들이 발견하고 싶은 것들은 새로운 여행지의 새로운 풍경일 수도 있고, 새로운 인연일 수도 있고, 새로운 나일 수도 있다. 내가 발견한 새로운 나의 모습처럼.

사람들은 내게 이어서 묻곤 했다. 어딘가로 떠나야만 새로운 것들을 볼 수 있냐고. 그럼 나는 말했다. 그렇지 않다고. 왠지 다들 떠나니까 떠나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으로 여행을 시작하지는 말라고.


각종 SNS에 올라오는 여행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나만 여행을 떠나지 않는 것만 같다. 다들 여행에서 인생을 깨닫고, 대단한 진리를 얻고 오는 듯하다. 그들이 친구들과 멋진 해변과 아름다운 건축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신나게 웃으며 셀카를 찍는 동안, 나만 집구석에 처박혀서 핸드폰이나 무의미하게 스크롤하며, 지루하게 인생을 보내는 듯하다. 그래서 나도 떠나면 지금의 이 지루하고 뻔한 일생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여행의 길이 늘 새롭지는 않다.


여행에서도 우리는 배고프고, 지치고, 덥고, 춥고, 짜증 나고, 졸리다. 인생을 꾸역꾸역 이어나가야 하는 숙명적 존재인 인간이 지니는 생리현상은 여행의 길이라고 나를 피해 가주지 않는다. 여행은 길고 지루하게 직선처럼 뻗어있는 시간 위에 환희의 순간이라는 낮은 밀도의 점들이 희미하게 찍혀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 희미한 찰나의 환희를 위해 낯선 장소에서 겪는 일들은 집을 떠나온 우리에게 후회를 안겨준다. '집 떠나면 고생이다'라는 생각과 함께. 게다가 처음엔 신기하고 낯설지라도 점차 익숙해져 버리는 낯선 도시의 풍경 속에 놓이면, 우리의 머리는 차라리 집에서 여행지의 사진들을 보는 것과 그 장소에 실제로 가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나은지를 계산하기 시작한다.

결론은 이렇다. 여행에는 정답이 없다는 뻔한 이야기가 많지만 이를 약간 비틀어보면, 여행만이 정답은 아니다. 새로운 나와 새로운 풍경,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발견. 그건 여행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어쩌면 나는 그저 현실 부적응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새롭게 든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묘한 안도감은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는 혼자만의 자격지심에서 생겨난 감정이었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여행은 정말 좋지만, 의무감에 여행을 떠나지는 말라고. 그러면 새로움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권태로 바뀔 거라고. 일상 속에서도 새로운 풍경은 얼마든지 마주할 수 있다고.


내가 조금만 시야를 넓히거나 좁히면, 매일같이 다니던 학교나 회사 앞 길에서도 새로운 모습들을 얼마든지 관찰할 수 있었다. 여행에서처럼 마음을 조금만 열면 길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고(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지금까진 몰랐던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일도 아마 어렵지 않을 수 있었을테다.

여행에는 정말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게 의무감에 의한 떠남이라면, 혹은 그저 SNS에 무언가를 올리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도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그 뒤에 몰려오는 공허함과, 사람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여행지에서의 처량한, 외로움, 피곤함, 지루함, 괴로움들을 감당하는 일이 훨씬 더 힘들 거라고. 둘 사이의 괴리감은 깊고 깊을거라고. 지인들의 물음에 나는 그렇게 부정적인 답변만을 내놓았다.


우리가 접하는 다른 이들의 여행은 대체로 좋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여줄 뿐이다. 이런 것들은 결국 하나의 잘 압축된 소설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런 소설들처럼 압축된 형태의 이야기로 펼쳐지지 않는다. 현실은 그런 압축적인 강조점들 뿐 아니라 희미한 작은 점들이 촘촘하게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길고도 지루한 선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길고 지루한 직선의 길 위에 작은 점으로 찍힌 환희들의 유통기한은 짧디 짧다.


지인들은 여행기를 쓰는 내게, 여행을 자주 다닌 내게 이런 이야기들을 듣는 일을 무척 어색하게 여겼지만, 그건 여행에 대한 내 진심이기도 했다. 여행은 나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주지만, 여행에서의 모든 일들을 감당하기 벅찬 순간들과 여행의 끝에 밀려오는 공허함에 둘러싸일 때면, 비겁하게도 나는 감히 누군가에게 여행을 추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느꼈던 것처럼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이 여행이라면, 여행은 인간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충동적이고 비 이성적이며 비 합리적인 행동의 결정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여행이 그런 것이라면, 여행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의무감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본능과 마주하는 그 순간, 비로소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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