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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Jan 31. 2017

할슈타트의 어둠

2016.02.09 in Český Krumlov & Hallstatt

하루 종일 이동이 많은 날이었다. 프라하에서 체스키 크룸로프로, 그리고 할슈타트로 가는 여정. 머물러 있는 시간보다 움직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여행은 결국 이동의 동의어가 아닐까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여행을 떠나며 우리가 기대했던 것들은 결코 여행의 시간 내내 펼쳐지지 않는다. 여행의 길 위엔 버스를 타고 차창밖으로 보이는 이름모를 얼굴들과 기차를 타고 달릴 때 펼쳐지는 들판들, 그리고 지하철의 어두컴컴한 터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국적인 풍경과 아름다운 자연, 그 속에서 갖는 나만의 시간과 같은 낭만적인 요소들은 마치 RPG 게임 속 레어 아이템처럼 드물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아이템들이 드물기 때문에 게임 속에서 값어치를 가지듯이, 이런 여행의 요소들 역시 여행을 떠나서조차 즐비한 일상의 풍경 속에서 보석처럼 나타나기에 더 우리를 감동시키곤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체스키 크룸로프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 터미널엔 한국인이 가득했다. 전날 스트라호프 수도원에서 함께 맥주를 마신 일행에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버스 터미널에 가면 체스키 크룸로프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 한국인들이 즐비해서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녀 역시 오늘 체스키 크룸로프로 이동한다는 이야기까지. 운이 좋다면 아마 그곳에서 만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버스에 올랐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프라하에서 남쪽으로 버스를 타고 두 시간 반 가량을 이동해야 갈 수 있는 작은 도시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프라하를 들렀다가 당일치기 형식으로 많이 가는 자그마한 도시인데, 나 역시 할슈타트를 가기 전에 잠깐 들러 구경하는 정도로 방문한 도시였다. 사실상 이 날의 가장 큰 목적은 체스키 크룸로프가 아닌 할슈타트였기에 별다른 기대 없이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보이는 들판들을 멍하니 구경하다 까무룩 잠에 들었다 깼더니 어느새 체스키 크룸로프에 도착해있었다. 마을 광장에 있는 인포센터에 무거운 캐리어를 맡겨놓고 천천히 도시를 걸었다. 할슈타트로 가는 차를 타기까지는 네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일단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프라하 숙소에서 만났던 한국인 친구였다. 어차피 적적했던 차에 나는 이 친구와 함께 적당한 식당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던 중에, 전날 맥주를 함께 마셨던 일행도 길에서 마주쳤다. 정말 작은 도시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반가움이 들었다. 마침 점심인데 식사를 안 했으면 함께 하겠냐는 제안에 흔쾌히 응한 그녀와 함께 셋이서 식당으로 들어가 점심식사를 했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의 식사는 보통 대충 먹게 되기 쉽다. 이렇게 우연찮게 만나게 되는 동행들이 아니면 보통 혼자서 끼니를 해결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나 같은 경우는 여행지에서의 맛있는 음식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라 더더욱 샌드위치 등의 간편식으로 대충 때우기 십상이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 다니게 되면 자연스레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게다가 평소엔 먹고 싶은 메뉴들이 여러 개여도 하나만 시킬 수밖에 없었다면,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식사에선 메뉴에서 먹고 싶은 음식들을 이것저것 시킨 뒤 각자가 시킨 음식들을 조금씩 맛보는 일이 가능하다. 혼자 외롭게 여행을 하다가 가끔씩 만나는 동행들과 식당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고 말이다.


식사를 마무리하고 우리는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체스키 크룸로프 성으로 향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라 그런지 거리에선 대체로 프라하보다 더 고풍스러운 중세의 느낌들이 묻어났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 있는 성으로 가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작은 도시였다. 성 위에 올라가자 강한 바람이 우리를 휘감았다. 도시를 끼고 흐르는 블타바 강과 함께 펼쳐진 자그마한 도시는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웠다. 막상 체스키 크룸로프 시내에서는 볼거리가 별로 없었지만, 이 작고 사랑스러운 도시의 전경을 보기 위해 잠깐 이 곳에 오는 것은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난 뒤 우리는 에곤 쉴레 아트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있어서 구경하고 난 뒤에 광장으로 돌아가서 차를 타면 될 것 같았다. 에곤 쉴레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화가였으나 어머니가 바로 이 체스키 크룸로프 태생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에곤 쉴레도 이 곳에서 자신의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첼과 함께 잠시 살았었다고.


그러나 아쉽게 에곤 쉴레 아트센터는 하필이면 이 날 휴관으로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쉬운 대로 열려있는 기념품샵에 들렀으나, 구경도 하지 않은 에곤 쉴레의 그림을 사기에는 애매해서 조금 구경하다가 바로 나왔다.


여기서 나머지 동행들과는 헤어지고, 혼자서 골목을 걸어 다녔다. 작은 도시였지만 골목길의 폭은 그리 좁지 않았다. 거리는 한산했고, 작은 가게들의 문은 체코 사람들의 덩치와는 맞지 않게 아기자기했다. 작고 조용한, 평범한 도시였다.

할슈타트로 향하는 차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마을의 중앙 광장으로 나갔다. 맡겨두었던 캐리어를 찾고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나처럼 할슈타트나 다른 도시로 향하는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 보였다. 나는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할슈타트 등의 도시로 이동할 때 가장 많이 이용한다는 '셔틀'이라는 이름의 교통수단을 이용했는데, 승합차 정도 크기의 차에 세네 명이 함께 타고 해당 도시까지 이동하는 형식의 이동수단이었다. 장거리 택시 정도의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나에게 배정된 차의 운전사가 와서 영어로 당신이 윤정욱이냐고 물었다. 물론 윤정욱이라는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진 못했다. 외국여행을 다니면서 내 이름을 한 번에 제대로 발음하는 외국인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윤융욱(?)이라고 하거나 윤중우라고 하는 식이었다. 뭐, 나도 그들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는 못하니까 매번 제대로 정정해주며 멋쩍게 웃고는 I'm from korea, not north. 라는 식으로 분위기를 풀곤 했다. 타지에서 혼자 여행하며 생겨난 능청스러움이었다.


나와 함께 할슈타트로 동행할 사람은 동양인 둘이었다. 혹시 한국인일까 싶어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싱가포르나 대만 쪽 사람들 같았다. 우리는 어색하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라탔다. 나는 조수석에 앉고 그 둘은 뒷좌석에 앉아 그렇게 세 시간 가량의 여정을 떠났다.


우리를 할슈타트까지 태우고 갈 운전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젊은이었다. 가는 길에 오스트리아의 도시를 지나칠 때마다 이 도시는 어떤 도시고(히틀러가 태어난 도시 라든지..) 저 산은 어떤 산이며, 지금 가는 길은 어떤 길이다 등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줬다. 그 설명을 들으며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던 나는 어느덧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앞엔 거대한 만년설이 보였고,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밤을 달려 할슈타트에 도착했다. 할슈타트에는 약간의 눈이 내리고 있었고, 호수를 끼고 있는 도시라 그런지 날씨는 쌀쌀했다.


자그마한 도시였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호텔이 있는 곳까지 차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나마도 골목길이 작아 아주 천천히 운전했음에도 마을의 끝에서 끝까지 가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 시간을 달려와준 운전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할슈타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일치기로 머물다 가는 곳이어서 위치가 좋은 곳엔 숙소가 그리 많지 않았다. 호텔의 가격과 호스텔의 가격이 비슷했기에, 창밖으로 호수가 보이고 위치가 좋은 호텔을 선택했는데, 내가 묵을 곳은 리셉션이 있는 건물이 아니라 또 다른 건물이었다. 직원이 캐리어를 끌고 내가 머물 숙소까지 안내해줬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락방 같은 느낌의 아늑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꿈꿨던 할슈타트에서의 휴식과 가장 잘 맞는 공간이었다. 창밖으로는 고요한 할슈타트의 호수가 보였고, 도시는 이제 막 7시를 넘긴 시간이었음에도 불빛을 찾기 힘들 정도로 어둡고 적막했다. 

숙소에 짐을 간단히 풀고 카메라를 챙겨 할슈타트의 야경을 찍기 위해 나섰다. 오스트리아의 전통 음식이라는 슈니첼을 먹고(이름만 슈니첼이지 그냥 돈가스였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돈가스를 먹으며 고향의 맛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길을 쭉 걸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저 멀리 5 fingers와 알프스의 만년설은 이미 짙은 어둠에 가려 희미하게 형체만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느리게 셔터를 눌러 사진을 찍었다.

할슈타트의 밤은 고요했다. '고요'라는 단어 하나만이 이 도시의 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식어였다. 차도 다니지 않고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드문 호반도시. 오랜만에 느끼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도시의 어둠은 환한 불빛 때문에 옅은 농도로 흩어지곤 하는데, 이 곳의 어둠은 여태껏 본 적 없는 농도로 도시를, 그리고 나를 덮쳐왔다. 그곳에선 해가 지면 어둠이 호수를 껴안았고, 적막이 마을을 덮었다. 다음날 아침 내 눈앞에 펼쳐진 할슈타트의 모습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https://www.instagram.com/jw_yoon_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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