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욱 Mar 13. 2017

20분

소설일수도, 아닐 수도 있는 짧은 소설

20분. 그가 녹내장 판정을 받기까지의 시간이었다. 간호사들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그를 각종 기계 앞에 앉혔다. 기계에선 바람이 나오기도 했고, 풍차가 보이는 어떤 풍경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어둠 속에서 녹색 불빛이 깜빡거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실험용 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의사의 소견은 이랬다. 왼쪽 눈 아래의 시신경이 파괴되었고, 높은 안압으로 인해 이미 녹내장이 진행되고 있으니 약물치료를 병행하자는 것. 시신경이 점차로 파괴되다 보면 시야가 점점 좁아져 종국에는 시력을 완전하게 상실할 것이라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하고 상상했다. 아니 그보다는, '스물아홉의 나이에 녹내장이라니'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어쩐지 간호사와 의사 모두 그를 안쓰럽게 여기는 듯이 보였다. 그 감정이 비록 그의 자격지심 비슷한 것에서 비롯됐다 할 지라도, 그 순간의 그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연민의 감정 비슷한 것들을. 명백하게 그의 시야는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그건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영수증 같은 종이 몇 장과 모니터에 깜빡이는 알 수 없는 사진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의사는 그가 시력을 잃게 되리라는 사실을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겨울이 오면 눈이 오는 것과 같은 아주 자연스러운 자연현상을 얘기하듯이 말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수술을 해야 하나요?”

그의 말에 의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녹내장은 수술로 치료될 수 있는 질병이 아닙니다. 일단 약물치료를 하며 시신경이 파괴되는 기간을 늦출 뿐이죠. 결국 언젠가는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겁니다”


의사는 그가 언제쯤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될지 알려주지 않았다. 아마 그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는 그 배려 속에서 공포를 느꼈다. 그건 그가 더 이상 건강한 사람이 아니란 신호였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건강은 아무래도 좋다'라고 생각했지만 단 한 번도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시야가 점점 좁아지며 시력을 잃게 될 거라니. 그러나 그의 시신경은 이미 파괴됐고, 지금도 파괴되고 있었다. 한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날은 현직 대통령의 탄핵 심사가 결정되던 날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파면을 선고받기까지의 시간은 약 20분 남짓이었다. 우습게도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직에서 파면되는 일과, 시력을 잃게 되리라는 통보를 받는 일 사이에서 개인에게 과연 어떤 것이 더 충격적인 일인지 저울질했다.


한 세계가 전혀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시간. 그 시간은 약 20분 남짓의 시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낭만이 여행자의 일이라면>북 토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