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백수의 하소연 에세이
요즘 사람들이 의례적으로 하는 “잘 지내?” 라는 인사에 사명감을 가지고 “잘은 아니고 지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이 예상하는 “응, 잘 지내” 그 대답 하나면 간단하게 넘어갈 텐데, 괜히 엉뚱한 대답을 해버려 피곤한 질문들을 피해 가지 못한다.
“왜 못 지내?” “뭐 힘들어?” “무슨 일 있어?”
물론, 걱정 어린 다정한 마음일 테지만 인생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시기에 그런 질문을 받으면 괜히 가슴이 턱 막힌다. 경험상 자꾸 내가 힘든 얘기를 하다 보면 마음이 더 힘들어지거나 과장하게 되고 상대방으로부터 섣부른 오해나 동정을 받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원하지 않는 충고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러면 마음은 좀 더 입체적으로 슬퍼지게 된다. 사람들은 서로를 대면할 때 타인으로부터 이왕이면 플러스의 감정을 얻고 싶어 한다. 기쁨, 즐거움, 유쾌함, 산뜻함, 흥분, 따듯함, 짜릿한 그런 것들. 인간의 마음에는 분명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은 선량한 마음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에는 커다란 갭이 존재한다. 타인의 괴로움과 슬픔을 오랫동안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일은 상상 이상의 체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온 마음을 다해 잘 공감하고 위로해 주고 싶다는 사명감을 갖고 누군가를 인터뷰하는 날에는 그다음 이틀을 앓아눕는다. 그러면 마음속에 어느덧 타인을 향한 위로고 나발이고 나부터 힘을 내었으면 하는 이기심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다. 애초에 나에겐 ‘타인을 잘 위로하세요’ 와 같은 권유를 할만한 자격이 없다.
온갖 말 못 할 사정들로 똘똘 뭉친 개인과 개인이 이미 많은 것들로부터 생명력을 빼앗긴 채 서로를 위해 한 뼘의 곁을 내어줄 수 없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고만 있자니 너무 슬픈 생각이 밀려들어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서로에게 밝은 에너지 만을 받기 원하는가. 처치 곤란한 더 많은 어두움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얼마 전, 어떤 순간에도 늘 거침없이 시원시원한 친구 M과 커피를 마시다가 이런 대화를 나눴다.
“난 말야, 위로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불편해. 자기 연민에 빠져 어두운 기운을 만드는 사람들이 싫다고”
“나도 자기 연민 쩌는데?”
“그래도 너는 밝잖아”
그 대화를 나눈 다음날 예민한 몸뚱아리에 두드러기가 돋았다. 자기 연민에도 '밝음'이라는 자격 조건이 존재하는구나. 그렇다면 나는 M을 속이는데 완전히 성공했다. 생각해보니 M과 만났던 날도, 누군가를 만났던 저번 주에도 저 저번 주에도 나는 늘 웃고 있는 표정이었다. 요즘 닥쳐오는 힘든 순간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때, 웃긴 해프닝처럼 희화화해 작은 이야기로 넘겨버리거나 큰 교훈을 얻었다며 섣불리 긍정적으로 마무리를 지어버리고 공기를 무겁게 만들지 않았다. 처음 내 사정을 털어놓았을 때는 분명 그 의도가 아니었는데, 불편해하는 사람들의 미세한 반응에 결국 또 밝은 모습만을 보이고 만 것이다. 어쩌면 우리 서로가 서로를 잘 위로하지 못하는 이유는 슬픔, 괴로움, 갈등, 방황, 고민, 분노와 같은 감정을 제대로 대면하거나 자연스럽게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나는 타인으로부터 위로받는 것을 포기하고, 가장 안전한 위로의 방식으로 책을 편다. 순전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내 마음을 해결하기 위해 책을 편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처럼 가능한 깊고 치열하게 고민한 사람들의 책을 펴본다. 우울한 기분이 들 때 가장 좋은 점은 사소한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책이 아주 잘 읽힌다. 기쁠 때는 전혀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던 (즐거운 현실이 마침내 찾아보면 나는 과감하게 책을 던져버리고 현실을 택한다.) 책 속의 단어 하나하나가 그제서야 생명력을 얻는다. 이 문장이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위로받을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매달린다. 소설가의 삶, 라디오 PD의 삶, 동물행동학자의 삶,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의 삶, 이혼 전문 변호사의 삶, 만화가의 삶, 채식주의자의 삶, 페미니스트의 삶, 성소수자의 삶, 시골 책방 주인의 삶을 어려 우연을 거쳐 책 속에서 만난다.
슬픔을 위로받으려다가 덤으로 다른 인생을 듣게 된다. 더 많은 삶을 이해하게 되고 조금은 겸손해진다. 그러다 보면 더 이상 나의 슬픔은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괴로움, 갈등, 방황, 고민, 분노라는 감정을 가장 객관적인 방식으로 음미하게 된다. 현존하는 최고의 언어로 위로를 받고, 책을 덮으면 산책을 하며 나 스스로에게 가장 양질의 질문을 걸어온다.
어제는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다 '아무튼 메모'라는 책의 마지막 장 우리의 삶은 결국 평생에 걸친 몇 개의 사랑으로 요약될 것이다 라는 문장을 읽고 심장이 쿵 내려앉아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인생의 방향을 다시 재정비할 때마다 나에게 가장 묻고 싶었던 말. 이 문장의 의미를 음미하고 싶어 잠시 정지한 가운데, 북적이는 퇴근길 지하철 계단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언젠가 멈춰있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생산적인 나로 돌아가야 할 때, 온갖 말 못 한 사정들로 똘똘 뭉친 서로가 서로의 삶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을 때, 지금 저금해 놨던 슬픔, 괴로움, 갈등, 방황, 고민, 분노들은 타인을 향해 한 뼘의 곁을 내어줄 수 있는 상상력이 되지 않을까? 결국 이 많은 이야기들은 훗날 나의 몸 어딘가에 쌓여 적당한 예시가 되고 감수성으로 자리 잡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멈춰있는 시기를 서둘러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기 보다 더 진득하게 누리고 싶어졌다.
나는 그제서야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