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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May 14. 2021

언제까지 우리는 이웃을 죽음으로 밀어낼 것인가

가톨릭 생명 주일 염수정 추기경님의 담화문을 읽고

러스트 벨트 지역이자 레드넥의 산실 디트로이트에 살고 있는 월트는 포드 공장에서 일하다 은퇴하고 여생을 보내고 있는 전형적 보수주의자, 소위 꼰대 노인이다. 한국 전쟁에 참전했을 때 수많은 한국인을 사살했던 충격으로 괴로워하는 그에게 아내는 동네 성당 신부에게 고해성사하고 참회할 것을 권유하지만 ‘가방끈 긴 27살 숫총각 애송이가 뭘 알겠냐’며 쿨하게 고해성사를 거부하는 월트. 그의 꼰대 기질은 평생을 함께 한 아내를 떠나보내도 나아지질 않는다.


그의 집 주변의 백인 이웃들이 떠나고 자꾸 유색인종 이민자가 들어오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 그러던 중 갱단의 협박에 못 이겨 월트의 차 ‘그랜토리노’를 훔치다 걸린 옆집 몽족 소년 타오를 알게 되고 갱단들로부터 타오를 구해주면서 그는 몽족들과 친분을 나누게 된다.

유색인종을 그렇게 탐탁치 않아하면서도 타오와 우정을 나누게 되는 월트 (출처: 네이버 영화)

월트는 타오에게도 여전히 잔소리를 하며 꼰대 짓을 한다. 그러나 타오가 영 귀찮던 월트 역시 차츰 정이 들면서 그에게 남자의 문화를 알려주며 아버지 역할을 하기 시작하고, 조금씩 타오와 깊은 정을 쌓게 된다.

그렇게 인종차별, 세대 차별 언어를 내뱉던 월터, 하지만 내 이웃은 내가 지킨다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러던 중 시한부 판정을 받은 그는 차츰 주변 정리를 하게 되고, 급기야는 타오의 가족을 괴롭히는 갱단을 패주는 등 몽족들과 진정한 이웃이 되는 것도 모자라, 그들에게 보복을 가한 갱단에게 쳐들어가 일부러 동네 사람들 앞에서 갱단의 총에 맞아 죽음으로서 자신과 친구가 되었던 타오를 비롯한 몽족 사람들을 갱단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나는 이정민 a.k.a Francisco Xavier,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뼛속까지 가톨릭 신자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만이 아닌, 세상 모두를 존중하고 사랑하라는 예수님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말씀을 따르며, 그다지 똑바로 살지는 못하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와 만난 사람들을 최대한 존중하며 내 도움이 필요한 곳에는 언제든 달려가겠다고 되뇌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지난 5월 2일 생명 주일 미사 주보 간지에 끼어있는 염수정 추기경님의 담화문을 보고 처음으로 내가 가톨릭이라는 게 부끄러워졌다.


지난 4월 27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제4차 건강가정 기본 계획안’에서는 동거 부부와 사실혼 부부, 함께 장기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호자 인정 등 가족의 정의와 범위를 확대하고 미혼모와 미혼부의 자녀 출생신고 등자녀의 성을 부모가 결정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는 사회적 논의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이날 주보 간지에 담긴 염수정 추기경님의 담화문은 이를 겨냥한 것이다. 제일 기가 찼던 것은 이 부분이다.


* 염수정 추기경님 담화문 전문 읽기 -> 클릭

특히 차별금지법안의 일부 조항에 드러나는 ‘젠더 이데올로기’와 여성가족부가 추진하는 ‘비혼 동거’와 ‘사실혼’의 ‘법적 가족 범위의 확대 정책’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인 가치로 여겨졌던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중략-
‘동성애’로 이해되는 ‘비혼 동거’와 ‘사실혼’을 법적 가족 개념에 포함하는 것도 평생을 건 부부의 일치와 사랑, 그리고 자녀 출산과 양육이라는 가정의 고유한 개념과 소명을 훼손할 수 있습니다.
이거 진짜 추기경님이 쓴거 맞나... 너무 악의적인거 아냐

한국 가톨릭의 수장이 진심으로 저런 말을 했다니… 일단, 염수정 추기경님이 담화문에 싸놓으신 저 말은 굳이 교회법이니 뭐니 들먹이지 않아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말씀에 모두 어긋난다. 루카복음 12장 3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신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번 여성가족부의 발표대로라면 다양성 가족이 곤란해했던 여러 부분이 개선된다. 예를 들어, 실제로 비혼 동거 중인 커플은 반려자가 교통사고가 나 급한 수술이 필요해도 ‘가족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서로 간의 약속으로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가족이라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법이 개정되면 다양성 가족의 구성원은 여러 가지 불편부당한 처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염수정 추기경님은 교회법을 들어 이것을 '생명 윤리에 어긋난다'며 비난하고 있다. '비판을 비난으로 호도하는 것 아니냐'는 분들이 있을텐데 이것은 엄연히 잘 모르는 것을 싸잡아 혐오하는 '비난'이다.


그 혐오는 ‘동성애’로 이해되는 ‘비혼 동거’와 ‘사실혼’을 법적 가족 개념에 포함하는 것 이라는 구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것은 현재 많은 사람들이 터부시하고 있는 것을 '동성애'라는 단어로 묶어 혐오를 부추기는 꼴이다. 이게 왜 사랑이고 생명인가?


우리 법에도 형법, 민법 등등 다양한 법이 있지만 그렇게 다양한 모든 법의 위에 군림하는 것은 바로 ‘헌법’이다. 우리 교회법 역시 마찬가지다. 가톨릭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교의 교회법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대로 신자가 살아가기 위한 가이드라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자에는 모든 법의 위에 있는 ‘헌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염수정 추기경님의 담화문에는 가톨릭의 상위 개념인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자리에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을 우리 사회에서 걸러내야 한다’는 차별을 담은 혐오 표현이 대신하고 있다.  


해결하기 힘든 고민이 있을 때 가톨릭 신자들이 떠올리는 생각의 기준이 있다.


What Would Jesus Do?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를 이루고 함께 살아가는 가족들을 보고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마태오복음 25장 4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는 사람 중 많은 분들은 사회적 편견 등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는 ‘작은 이들’의 입장에 있다. 예수님이라면 그들에게 교회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밀기보다,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주시며 함께 사는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공식적인 담화문에 저런 몰상식한 구절이 들어가 있는 것은, 염수정 추기경님 아니 가톨릭이 현재를 살아가는 가족의 정의와 다양한 형태 등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에 대한 고해성사와도 같다. 우리와 다른 것을 혐오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단정 짓는 것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무식한 일인가. 어떤 사람들은 ‘그것도 생각의 자유’라며 자신의 생각을 막지 말라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 백보 천보 양보해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걸 입밖에 내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지나가는 나를 보고 누가 ‘음… 뚱뚱하고 머리 크네’ 생각할 수는 있다 치더라도 누가 나한테 다가와서 ‘초면이지만 살 좀 빼시죠. 머리도 큰데’ 하면 내 기분이 어떻겠나. 휴....


미국 북동부 공장지대 출신에 전직 군인인 전형적인 레드넥 월트는 그야말로 진성 보수주의자였다. 타오와 몽족을 갱단의 위기에서 구하느라 목숨까지 바친 건 그가 개과천선하고 변했기 때문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렇게 친구를 위해 희생하기로 결정하고 총에 맞아 죽을 때까지도 끝까지 꼰대였다.

'꼰대'라 쓰고 진짜 보수라 읽는 월터 (출처: 네이버 영화)

그가 총에 맞아 죽기로 결정한 것은 단순히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아서가 아니라, ‘저 유색인종들이 신고하면 경찰들이 신경도 쓰지 않을 거야’라는 인종차별적 생각에 ‘너희들이 뭘 알아서 하겠냐’는 꼰대적인 마음이 섞인 결과였다. 그의 꼰대성은 죽은 이후에도 돋보인다.


월트가 죽은 후 공개된 유언장을 통해, 그가 아끼던 차 ‘그랜토리노’는 타오의 소유가 된다. 그러나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월트는 끝까지 그 꼰대성을 버리지 못했나 보다. 오만 인종적, 인간적 차별 단어가 죄다 범벅되어 있는 그의 유언은 이렇다.


첫째, 히스패닉 떨거지 마냥 차 지붕 뜯어내지 말 것.
둘째, 레드넥 병신처럼 멍청한 불꽃 모양 도장하지 말 것.
셋째, 아시아 게이처럼 후미에 터무니없이 큰 스포일러 달지 말 것.
튜닝하면  좆같아 보인다. 이 사항들만 지킨다면 차는 네 것이다.


그가 타오와 몽족을 구한 것은 인종차별, 세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는 박애주의자/평화주의자로 개과천선해서가 아니다. 월트는 그저 자신과 정을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멋진 꼰대로 가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보수’라는 이념의 진정한 가치이다. 이 글에서 꼰대, 꼰대 했지만, 월트는 사실 진정한 보수주의자를 지칭하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그랜토리노’는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내용이 아닌, ‘진정한 미국의 보수주의자는 어떠한 스탠스를 취해야때  할까’라는 화두에 대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응답이다. 극도의 보수주의자였으면서도 트럼프를 혐오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영화.


'그랜토리노'와 이 글을 염수정 추기경님이, 아니 가톨릭에서 보고 무슨 사과문을 내거나 그분들의 생각이 바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천주교 서울 대교구 생명위원회의 위원장이기도 한 염수정 추기경님은 자신의 담화를 ‘생명 존중’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꼭 알아두었으면 한다.


염수정 추기경님의 담화문을 읽은 어떤 다양성 가족의 일원이
희망을 잃고 그들의 생명을 버릴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 과연 생명을 위하는 길인가?





[이벤트 공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쩌다 보니 브런치 100번째 글이 심각하고 지독하게 긴 글이 되었군요. 100번째 글 기념으로 작은 이벤트를 진행해 보려 합니다.

좀 귀찮으실 수도 있는데, 제 브런치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글에 [100] 말머리로 댓글을 달아주세요. 5월 14일부터 5월 21일까지 1주일간 달린 댓글 중 세 분을 뽑아 소정의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귀찮으시겠지만, 어설프게 커피 한 잔 보내진 않을 테니 기대(?) 해 보세요.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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