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어놓으니 좀 나아지더라. 다들 그랬기를...
날이 풀리고 벚꽃이 일찍 온걸 보니, 올해도 다시 떠날 때가 됐나보다. 아직 미시령을 넘기는 조금 춥지 싶고… 그렇다면 결론은 제주도. 급한 일을 끝낸 후 얼른 짐을 싸서 훌쩍 떠났다? 숙소? 여행 스케줄? 몰라몰라. 뭐 일단 가면 알아서 되겠지. 어차피 남들 부러 가는 여행지는 잘 가지도 않는데 뭐.
평일 아침인데도 작년 10월과 12월보다 훨씬 사람이 많다. 골프들도 많이 치러 가는거 같고… 이사람들 너무한거 아냐? 하기엔 나도 이렇게 바리바리 짐싸서 나온지라… 그저 모두 방역수칙 빡세게 지켜서 안전한 여행하고 돌아가길… 일단 밥을 굶었으니 공항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때우고 비행기에 올라타 본다.
아침 비행기로 일찍 건너가 일단 자전거부터 예약했다. 그렇다. 이번 여행 역시 자전거 투어다. 좀 힘들긴 하지만 제주 바다와 풍경을 지겨울 정도로 보려면 이게 최고지. ‘제주환상자전거길’의 시작은 제주국제공항 뒷편 담벼락을 따라가는 길이다. 바닷가에 정비하는 비행기까지… 여행을 출발하는 기분을 업시키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일단 날래게 페달을 저어 이호 테우해변에서 첫 번째 휴식을 취하면서 상태를 점검했다. 지전거 탈 때 하도 머리가 날려 와치캡을 하나 샀더니 그럭저럭 띵호와 괜찮네. 다만, 저 얇디 얇은 자전거 안장… 벌써부터 R과 HM 사이가 욱신욱신 아파온다. 아직 4일이나 남았는데… ㅠㅠ
자전거길을 따라가다 만난 귀여운 강아지들. 저 쪼꼬미들에게 입마개를 해놓은 것도 귀여운데 한 녀석은 풀리기까지 했구만. 아주 순하게 포즈를 취해준다.
제주환상자전거길은 내비게이션이나 지도 같은걸 굳이 들고다니지 않아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메인 도로에 있는 파란 줄만 따라가면 제주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제주환상자전거길을 일주할 수 있다.
해변의 거의 모든 명소를 지나치다 보니 이렇게 절경에 혼자 있는 여자분들이 종종 보인다. 한번 다가가서 ‘누구신진 모르지만 전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라며 말을 한 번 걸어보자. 아마 보통은 미친놈 만난듯 보거나 멸시를 당하겠지만, 혹시 아나? 아, 반응이 이상하고 얼굴이 일그러진다 싶으면 도망가자. 한 번 물어봤는데 분위기 안 좋으면, 사과하고 토끼는게 국룰.
제주환상자전거길 중간중간 휴식 코스에는 자전거길 일주 확인용 스탬프가 마련되어 있다. 이렇게 하나하나 인증하며 2~3개 인증센터를 지나다 보면 슬슬 제주환상자전거길의 이름이 바뀌기 시작한다. 바로, 제주’환장’자전거길 시작. 첫날 코스는 그렇게 높은 언덕은 없고 해발 20~30m 정도 언덕만 반복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힘들다.
여기서 하나 막간 상식. 이번 여행에도 나는 PAS식 전기 자전거를 대여했다. PAS는 ‘Power Assist System’의 이니셜이다. 해석 그대로 전기 모터가 주행을 도와주는 방식. 1~5단까지의 어시스트 단계가 있는데 1~2단계만 해도 20~30m 의 비교적 완만한 언덕 같은 곳에서는 확실히 페달링이 가벼워진다. 문제는 배터리. 배터리가 맥주 두 세병 정도의 무게인데, 매뉴얼에는 1단 상태에서 최대 100km를 달릴 수 있다고 써있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늘 그랬듯 다른 법. 1~2단을 반복하다 보면 60km도 채 가지 않아 슬슬 배터리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게이지 상 1칸이 내려가도 실제로는 거의 50% 남짓 남아있다고 보면 됨. 배터리가 떨어진 PAS식 전기 자전거는 기어도 없는, 그냥 무거운 자전거일 뿐이니 배터리 관리에 신경을 써야한다.
아침 10시부터 남아있는 반미 한 쪽 씹어가며 40km를 달려 한림 해변에 다다랐다. 혼자 여행갔을 땐 굳이 맛집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어차피 혼자 먹을 수 있는 메뉴도 한정 되어있고.
미친듯 배가 고파 아무데나 보이는 ‘한림웅담 보말칼국수’라는 식당에 들어갔다.거북손 보말 칼국수를 시키려 했으나 이미 재료가 소진되어 보말 미역 해장국을 시켜본다. 오, 이녀석 그냥 미역국 같았는데 국물도 묵직하니 좋고 보말도 제법 들어있네. 사장님, 제주 막걸리 하나요~~ 톳 무침과 김치를 비롯한 반찬도 맛있음.
속을 든든히 채우고 달리다 보니 풍차가 보이고… 묘한 노스탤지어와 함께 갑자기 체력 게이지가 깜빡이며 0%를 알린다. 아참, 나 숙소도 예약 안했지? 얼른 에어비앤비 홈페이지에 들어가 부근 숙소를 검색하니 ‘메종손드물’이라는 묘한 게스트하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여기다. 자전거로 5분도 안걸리는구만.
꽤 고풍스러운 건물 뒤로 가니 시베리안허스키 한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오고. 이녀석 눈빛은 매서운데 완전 순둥이구나. 넥 초크로 얼른 제압하고 놀고 있으니 스태프가 나와 체크인을 돕는다.
근처에 식당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이제 저녁과 밤에 일용할 양식을 마련할 시간. 자전거로 편의점에 가서 맥주와 라면 등을 사서 오는데 해가 이미 넘어가고 있다. 아… 여기 완전 일몰 맛집인데 맥주 한 잔 먹겠다고 이 장관을 놓쳤구나… 이건 출발전 찍어놓은 사진.
사발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인터뷰이에게 보낼 질문을 정리하고 있자니 스태프가 다가와 요것조것 묻는데… 마케팅 일을 하다 그만두고 내려온 청춘인가보다. 맥주는 넉넉히 사왔으니 기왕 판이 벌어진 김에 다른 두 분도 나와 같이 맥주 한 잔 하자고 꼬셨다.
평일 제주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늘 뭔가 인생의 기로에 선 사람이었다. 마케팅 회사에서 밀려난 신입 직원, 반도체 회사에서 정리해고 된 6년차 회사원, 유도만 하다 군복무 마친 휴학생… ‘지속 가능한 프리랜서 생활’을 꿈꾸는 나. 어차피 길은 스스로 찾는 것… 서로에 대한 느슨한 정보를 공유한 후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맥주를 한 잔 하는 것 만으로도, 달라진 것은 없지만 뭔가 속이 후련하고 마음이 편안해 지더라. 같이 시간을 보낸 분들도 나와 같았기를… 이렇게 제주 자전거 일주의 첫 날이 지나갔다.
-코스: 제주 공항-이호테우해변-하귀 포구-애월항-곽지과물해변-한림항-금능포구
-거리: 약 50km
-들른 관광지: 그딴거 없음
-마신 술: 숙소에서 만난 친구들과 테라 3병, 제주 펠롱에일 4병, 한라산 500ml PET 1병
-기억나는거: 시베리안허숙희 ‘드물이’
-다음 글: 제주 자전거 투어 #2: 3번의 고백, 어쩌다 북콘서트